왕이 나셨도다 (The King of King was Born!)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아마 전세계 크리스천들이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절기가 있다면 단연 성탄절일 것이다.

성탄절은 어린이와 장년은 물론, 심지어 비신자까지도 설레임으로 기다리는 날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아볼 때, 성탄절이 원래부터 주목받았던 것은 아니다.

초대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님의 임재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유년기에 관한 주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초기 교회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따로 기념하지는 않았다.  

성탄절이 교회 내에 본격적으로 정착되게 된 것은 4세기 전반으로, 주현절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이다.

이는 3, 4세기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념할 성탄절 절기가 정통교회의 환영을 받게 된 까닭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강단을 통해 성탄절이 추구했던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고유한 빛들을 회중 앞에 밝히 드러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 가지 주제, 세 가지 관점에서 성탄절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

성탄의 의미 – 인간이 되신 하나님

성탄절이 내포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바로 성육신에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성탄절이 주현절로 분리되어 독립적인 절기가 된 배경에는 이단들에 의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심각한 도전, 특히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논쟁과 관련 있다.

325년 니케아 회의를 통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공인한 이래, 교회는 참 신이며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절을 중요하게 기념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탄절은 단순히 기쁨의 절기 이전에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심오하고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있는 절기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요한의 기록처럼, 성탄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임하신 사건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 Stott)는 성육신의 놀라움과 그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은 길지만 가치 있다.

“우리가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어렴풋이 알아낸 실재가 아무리 풍성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전히 무한히 멀리 계신 분이시다. 저 멀리 계시는 분이 단 한 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눈은 인간의 형태를 한 참된 ‘영광’, 궁극적인 인격적 실재의 광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4)을 보았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기이하다.

그러나 성육신 사건과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성육신의 목적이다. 성육신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비천해지신 하나님의 행동이다.

곧, 우주의 빛이신 그분께서 세상의 어둠 속에 들어오셨다. 하늘의 고귀한 왕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하늘의 기쁨을 지상의 슬픔과 맞바꾸셨다. 하늘의 찬란한 보좌를 더러운 마구간의 구유와 맞바꾸셨다.

만왕의 왕께서 죄인 된 우리 대신 끔찍한 십자가에 찢기시고 죽으셨다. 우리 앞에 예정된 죽음의 잔을 하늘의 왕께서 대신 마셨다. 그것이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성탄의 사건 – 기이하고 놀라운 왕의 탄생

또한 성탄은 만왕의 왕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탄 사건 자체의 기이함과 놀라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탄 사건 자체가 그분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 어떤 왕의 탄생과 비교할 수 없는 기이함과 놀라움이 있다.

이에 관해 설교의 왕자, 스펄전(C. H. Spurgeon)은 그것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천군 천사들이 장엄한 합창과 찬양을 올렸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탄생하신 그 광경은 실로 장엄하다. 인간 찬양대나 성가대란 수십 명 혹은 많아야 수백 명으로 구성되지만,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이 그 밤 찬송했다.(눅 2:13)

하늘의 총사령관이신 하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천군이 그를 호위하며 지상에 내려왔으며, 그 하늘의 군대는 천사들과 함께 만왕의 왕의 탄생을 우주가 울려 퍼지도록 찬송했다. 아마도 그 밤은 천지 창조 이래 하늘의 군대와 천사들이 모두 참여한, 온 우주가 들썩였던 웅장한 밤이었을 것이다.

둘째, 이 아기의 탄생의 의미 또한 독특하다. 천사들은 이 탄생의 놀라운 의미를 이렇게 노래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통해, 바다의 물고기를 통해, 들의 꽃을 통해, 번개를 통해, 시냇물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탄생이야말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참으로 영광이 된 사건이었다.

또한 그분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의 길이 열렸다.(막 10:45)

그리고 언젠가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아기들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으며 장난할 완전한 새하늘과 새 땅, 완전한 평화가 임할 것이다.(사 11:6-8)

다윗의 동네에 나신 구주는 칼과 무력으로 다스린 팍스 로마나 (Pax Romana)가 아니라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는 팍스 크리스티나(Pax Christina)의 주인이시다.(눅 2:10~11)

성탄의 주도성 – 하나님이 행하시다

성탄 설교에서 눈을 돌려야 하는 또 다른 면은 성탄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주도성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의 말처럼, ‘무엇보다 성탄절은 일방적인 기쁜 소식과 위대한 선언의 절기’이다.

성탄은 인간이 행한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하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성탄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사건이다.(갈 4:4)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성은 성탄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을 면밀히 살피면 실로 그러하다. 예를 들어, 사갸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부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천사가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선언’한다.(눅 1:33)

마리아의 경우에도 똑같은 일이 나타난다. 어느 날 갑자기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한다.(눅 1:28)

또한 들판의 목자들을 보라. 그들은 한밤중에 양 떼들을 지키며 들판에 있었다. 그전에도 목자들은 수백 번씩 수천 번씩 그런 일을 계속했었다. 그러니 무슨 특별한 일을 기대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들을 통해 일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렇게 왔다.

사가랴는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셨도다”(눅 1:68) 성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우리는 그저 뒤로 물러서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일들을 경외심으로 바라보며 그분을 경배하며 감사할 따름이다.

내 마음의 성탄

성탄을 앞두고 설교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메시야 탄생에 대한 소망이 분주한 목회사역 속에 관습처럼 무감각해지며 기계적으로 되는 일이다.

일찍이 옛 설교자들은 설교자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위험을 ‘직업주의’라고 조언한 바 있다.

성탄의 사건은 누구보다 먼저 설교자의 사건이 되어야 하며 설교자는 증인이요, 목격자로 감격과 경이 속에 이 기쁜 소식을 회중에게 알려야만 한다.

초대교회, 교부 오리게네스(Origenes)는 말한다.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탄생하셨지만 만일 내 마음에 태어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윗의 동네에 태어나신 우리의 유일하신 황제께 무릎을 꿇고 그분의 발에 입 맞추며 경배하자.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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