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섬김을 최우선하는 장로”
철저한 예배가 3대째 헌신의 원천
3대 장로 가문을 이룬 조정현 장로 가정은 후암백합교회(김선인 목사)의 자랑이다.
조정현 장로는 어려서부터 조부 조인정 장로의 인품과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고 조인정 장로는 교단 부총회장과 장로회장을 역임하는 등 교단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로 교회뿐 아니라 교단적 인물로 유명하다. 이런 조부의 신앙 유산은 2대 아버지 조원일 장로를 거쳐 조정현 장로까지 3대 째 이어지고 있다. 장로 뿐 아니라 집안에 목사도 배출했다. 송현교회 조광성 목사가 1대 조인정 장로의 차남이다.
1대 조인정 장로는 우리 교단 부총회장과 장로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단 발전에 초석을 놓은 신앙인이다. 조인정 장로는 1938년 목포에서 문준경 전도사를 만난 후 북교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장로교회를 다녔지만 문 전도사의 권유로 북교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이후 이곳에서 세례까지 받았다. 거처를 서울로 옮긴 후에는 후암백합교회로 이적했고, 1955년 장로로 취임한 후 1965년 전국장로회장, 1967년 제22회 총회 회계를 거쳐 1969년 제24회 교단 총회에서 부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교단 평신도 대표의 자리에 올랐지만 사실 조인정 장로는 화려한 교단 이력보다 교회를 묵묵하게 섬기는 섬김의 본을 보인 것으로 더 유명하다. 한국은행에 오랫동안 다녔던 조인정 장로는 교회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사비를 털어 섬겼다. 때로는 개인 신용대출을 받으면서까지 헌금하는 섬김의 사람이었다. 섬기는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사례비를 주지 못하자 자신의 월급을 모두 드렸으며 사택 수리를 위해 개인 비용을 지출하기도 했다.
또한 후암백합교회 건축 당시 남은 채무를 개인 비용으로 상환하기도 했다. 아들 조원일 장로는 “아버님은 이성봉 목사님과 이명직 목사님이 서울로 집회인도차 오시면 꼭 집으로 모셨다”며 “목회자 섬김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섬기셨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조인정 장로는 가정예배도 철저했다. 새벽예배를 마친 후에는 꼭 모든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찬송을 부른 후 말씀을 읽어가는 가정예배는 어렸던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자녀들 모두 장로와 권사, 집사로 각 지역에서 섬기고 있다.
1991년 6월 장로로 장립한 조원일 장로는 오랫동안 건설회사에 다닌 조 장로는 해외 체류 기간이 길었던 탓에 아버지만큼의 신앙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머무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일터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일례로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3년간 머물렀던 조원일 장로는 주말이면 술판을 벌이는 한국인 직원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매주 주말이면 별다른 취미없이 음주를 즐기던 직원들을 위해 작은 골프 연습장을 만들고 주일 아침에는 함께 교회갈 것을 권유했다.
조원일 장로는 “내가 상사라고 해서 억지로 신앙을 권유하는 것보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인도했더니 하나둘 씩 따라왔다”며 “나중에는 모든 직원들이 주말이면 술을 끊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뚝심있는 신앙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3대 조정현 장로는 올해 6월 장로로 장립해 신앙의 전통을 잇고 있다.
조정현 장로는 한국에서 고려대 졸업 후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친 법률가이다. 그는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국비장학금을 받으며 국제법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의 수재로, 현재는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3대 조정현 장로도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약해질 법도 했지만 오히려 한국의 교회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영국 유학시절에는 후암백함교회 주보를 보면서 교회를 위해 기도했고, 이후에도 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 꼭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한다.
조정현 장로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1대 조인정 장로의 믿음을 유산으로 받은 조원일 조정현 장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신앙 가풍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