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며 참 쉼을 원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 인생의 고달픔과 아픔이 또 다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옵니다.

잔병치레, 긴병치레, 때로는 그냥 죽기를 바랐던 심정으로 눈물을 삼켜야 하는 참혹한 현실이 ‘샬롬’을 구하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합니다.

감옥과 같은 현실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의 마음에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닿기를 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 40:1~2)

생의 마지막 기회마저도 잃은 듯 했던 요셉의 인생이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고난의 때, 고통의 때가 끝났고 이제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풀어 가시는 시간을 만난 것입니다.

요셉의 도움으로 석방된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자가 애굽 땅에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술 맡은 관원장은 그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던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급히 옥에서 불러냅니다.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4절) ‘옥’(쏘하르), 보디발이 요셉을 가두어 두었던 곳입니다. 이어 바로의 두 관원장이 들어가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 말씀에서는 원문에 ‘옥’이 아닌 ‘구덩이’(보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덩이’는 형제들이 요셉을 던져 넣었던 곳입니다.

그 구덩이를 지금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구덩이는 어떤 곳입니까? 요셉으로 하여금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만든 곳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곳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시작이 되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은 요셉을 ‘그 구덩이에서’ 급히 빼내셨던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을 끝내시고 그 구덩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고난도 끝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구덩이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가난의 구덩이에서 우리를 부유케 하기 위함입니다. 약한 나를 강건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누릴 평강과 병 나음을 위해서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둘러보십니다.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고통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고치시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다시 보게 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살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가시니라”(막 11:11)

이튿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신 일은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전 날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내리신 결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 된 우리의 마음을 구석구석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다면 기도할 마음으로 고치십니다.

고난의 수렁에서 헤매고 있다면 곧 그 구덩이에서 구원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둘러보시는 은혜가 있음을 확신하십시오. 요셉을 그 구덩이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도 그 구덩이에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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