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대책위' 건의로 교단 강남시대 마련

남영호 집사는 1950년 3월에 김천남산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의 나이 불과 29세였다. 당시 교단 헌법에 장로에 대한 나이 규정이 30세 이상이었는데 만으로 한다는 규정이 없어 한국 나이 30세가 된 그 해에 교회 사무총회의 결의와 지방회의 시취를 통해 장로로 세워진 것이다. 교단 역사상 30세 이전의 장로는 그가 처음이었다.

남영호는 장로가 된지 한달 후 그 해 4월 18일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열린 제5회 총회에 경북지방회 대의원으로 참석했다.

이 날 이후 그는 정년이 된 1991년 총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무려 42회나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교단의 발전에 직, 간접으로 공헌했으며 1949년에 윤판석 장로와 함께 교단의 주일학교 전국연합회를 창설하여 부회장으로 수고하다가, 제2대 회장으로 4년간(1955~1959) 헌신하며 교단의 교회학교 연합사업의 기초를 놓았다.

또한 그는 1963년 전국장로회 회장으로, 1964년 교단의 남전도회 창설 7인 멤버 중 한 사람으로 공헌했고, 1970년 교단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총회의 성장과 발전에 헌신했다.

교단이 1965년 제1차 합동총회를 개최한 후, 교단의 발전을 위해 염려하던 남영호 장로는 몇 몇 장로들과 뜻을 같이 하여 교단에 ‘부흥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교단발전에 공헌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969년 4월 총회에 남영호 장로가 속한 경북지방회 외 6개 지방회 건의로 ‘부흥대책위원회’ 구성이 총회에 제안되었다.

 제안된 내용을 보면 1억원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차로 서울신학대학의 자립기금으로, 2차로 총회의 선교와 교육 활성화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어서 총회는 토의 끝에 결의했다.

총회에서는 22인의 장로를 위원으로 선임하였고 위원회는 한국은행 전무를 역임한 조인정 장로를 위원장으로, 남영호 장로를 서기로 선임하고 위원들이 전국의 교회를 방문하여 모금활동을 했다. 그 결과 1977년 4월까지 모금액이 거의 1억원이 되자 총회의 결의로 그 중 3분의 1을 서울신학대학교 자립기금으로 지출했고, 나머지를 은행에 증식한 후, 미래를 위해 강남의 개발에 따라 대치동 890번지 대지 250평을 사게 된다.

1961년 교단의 분열되면서 성결교회의 발상지 무교동 중앙교회의 대지가 오랜 소송으로 진통을 겪었는데 1977년에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중앙교회가 3분의 2, 교단이 3분의 1을 나누기로 한 합의에 따라 중앙교회는 약 3억을 받아 종로 6가의 현 중앙교회 대지를 사서 이주했고 교단은 총회 결의에 따라 약 1억 5천을 가지고 부흥대책위가 구입해 둔 대치동 대지에 성결회관을 짓기로 했다.

1978년 착공 할 당시 대치동은 허허벌판이었다. 당시는 1천평 이상을 허락하지 않아 연건평 998평, 10층의 건물을 지어 1층에서 5층까지 총회본부 사무실로 사용하고, 6~9층은 30여개의 숙소, 10층에 식당을 만들어 선교와 교육의 장소로 설계되었으며 착공한지 1년 3개월 만에 완공하게 되었다.

건축을 위해 전국 교회가 십시일반으로 헌금을 했고, 모든 교역자들은 총회의 결의로 한 달 분의 생활비를 성결회관 건축하는데 기쁘게 헌금했다.

마침내 1980년 5월 성결회관 봉헌식을 할 때 성결인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건물은 당시 기독교 각 교단 총회본부 중 맨 처음 갖는 총회회관이어서 교계가 놀랐고, 또 강남구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구청장이 와서 구경할 정도였다. 이것은 이 대지를 미리 마련해 둔 ‘부흥대책위원회’의 공로며, 이를 발의한 남영호 장로의 선견자적인 탁견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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