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목사(예천백합교회)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신학대학원(M.Div) 입학 면접을 볼 때 면접관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목회자는 무릎으로 기도하는 ‘골방’, 연구하고 공부하는 ‘책방’, 그리고 만나고 관계하는 ‘심방’ 이렇게 3개의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교단의 큰 부흥사이신 고(故) 이만신 목사님의 명언으로 답을 드렸다. 교수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며 그 마음을 끝까지 잃지 말라고 조언해주셨다.

지금까지 농촌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던 그 시절의 첫 다짐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문제의 해답과 하늘의 방법을 구하려고 ‘골방’에서 엎드리는 방법을 선택했으며 틀에 박힌 생각과 혼자만의 고집에 빠지지 않으려고 ‘책방-도서관’을 만들어서 책을 읽고 삶과 목회에 적용하는 시간을 보냈으며, 영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품고 ‘심방’하는 심정으로 인사드리며 동네를 누볐다.

골방 목회

지방회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다녀온 날이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사모의 전화를 받았다. 새벽 집중호우로 교회 옆에 있는 산의 진흙이 밀려와 교회를 덮쳤다는 것이다. 사모 혼자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 안으로 밀려드는 시뻘건 흙탕물과 진흙을 혼자 막아내며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에 가슴이 무너지는데, 사모는 전기판넬이 깔린 바닥이 전부 물에 잠겨 못쓰게 되었다며 울먹였다.

허겁지겁 교회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 교인 두 분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온 진흙을 쓰레받기로 퍼내고 계셨다.

“목사님, 이거 어떻게 하지요? 흑흑.” 다 젖어버려 못쓰게 된 예배당 성물들을 닦으며 우셨다. 목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교회가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새벽 폭우가 남긴 피해는 무려 2천만원! 작은 농촌 교회에 너무나도 큰 시련이었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교인들에게 기도하자는 각오를 전하고, 무너진 강단에 무릎을 꿇었다.

새벽으로 저녁으로 성전 복구를 위한 기도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배 목사님께서 교회 안부를 물으셨다. 폭우로 인한 피해 소식을 전하며 교회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선배 목사님은 총회본부에 수해 보고를 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총회 본부에 재난 신고를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총회장 목사님이 교회를 방문하셨다. 총회장님은 수해로 엉망이 된 교회 안에서 지친 목사 부부와 어린 5남매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날의 위로와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 전국에서 우리 교회를 돕겠다는 연락이 이어졌다.

한 달 만에 피해 금액이 모두 모여서 수해 복구뿐 아니라 비만 오면 질퍽하던 교회 진입로 전체를 시멘트로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면, 기적이 일어난다.” 교인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4기 충만’ 원칙이다. 문제를 만났을 때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와 방법을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폭우 사건을 계기로 나와 교인들은 ‘4기 충만’의 원칙을 더 깊이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책방 목회

“어휴~ 무슨 책이 이렇게 많아요. 힘들어 죽겠네.” 이사할 때마다 듣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푸념이다. 목사가 책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사할 때는 참 곤란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20년 동안 지고 다닌 책이 1만 권이다.

신학생 시절에 씨름하며 읽었던 신학 서적, 전도사 시절 첫 설교 준비를 위해 발품 팔아 산 예화 설교집, 이걸 언제 다 읽어보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거금 치르고 구매한 히브리어 성경, 설교 한번 잘해보겠다는 일념에 구매한 주석과 전집들, 그리고 유명하다고 소문나서 구매한 단행본들… 내 개인 서고의 귀한 재산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책이 재산인 목사에게 하나님은 <책방>에서 깨닫게 하셨다. “책으로 목회하자!” 전국에 있는 ‘작은 도서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개인이 만들 수 있는 사립 ‘작은 도서관’은 현행 도서관법으로 10평의 공간에 책 1,000권만 있으면 등록할 수 있다.

도서관에는 십진 분류에 따라 모든 분야의 책이 들어온다. 우리 도서관에 비치되는 책들이 어떤 책인가는 살펴봐야 하니 모두 읽어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광범위한 독서의 유익은 설교를 위한 독서에서 지경이 넓어지는 독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설교의 폭도 넓어진다. 무엇보다 나 혼자 책을 읽는 것을 넘어 함께 책을 읽으며 사람들과 넓고 깊게 교류 할 수 있다.

목회에 접목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렘도 잠시, 막상 시작하려니 걱정이 밀려왔다. 우선 우리 교회의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 밑이라 접근성이 떨어졌다.

고민이 쌓여가던 어느 날, 아이들을 하교시키려고 초등학교 앞에서 차를 세우고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학교 앞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영화처럼 한 장면이 클로즈업되었다.

남자아이들 몇 명이 학교 앞 슈퍼 담벼락에 서서 겨우겨우 비를 피하며 사발면을 먹고 있었다. 물도 붓지 않은 생라면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고 안쓰럽던지….

그러고 보니 하교 시간과 학원 시간 사이에서 시간을 메꾸느라 어정쩡하게 서성이는 아이들, 갈 학원이 없는지 문구점 앞에 쭈그려 앉은 아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저 아이들이 편안하게 쉬며 시간을 알차게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순간 아이들에게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막상 ‘작은 도서관’을 시작하려 하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았다.

상가를 빌려야 하니 매달 월세와 공과금을 내야 하고, 계속 새 책을 공급하고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도서 구입비와 프로그램 비용도 필요했다.

어떻게 재정을 채워야 할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상주해서 관리해야 하니 발이 묶이는 것도 부담이 되었고, 도서관 회원을 확보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해야 할 일도 태산인데 주변의 부정적 반응들이 힘겹게 일으킨 의욕을 꺾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찾아와 학교 도서관에 3만 권의 책이 있는데 이런 작은 도서관이 왜 필요하냐며 쓴소리를 하시고, 상가 주인 할아버지는 도서관 입장료를 얼마 받아야 임대료를 내겠냐며 혀를 차시고, 뒤편 건물 교회 목사님은 10년째 학교 앞 전도를 하며 목회하고 있는데 ‘작은 도서관’을 여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며 어깃장을 놓고 가셨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한국 작은 도서관협회’의 사무총장이다. 작은 도서관 운영 우수 사례를 알려 달라고 전국의 도서관으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는다.

우리 지역에서는 도서관 업계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내가 만든 작은 도서관에는 총회원 323명(도서관 옆 초등학교 전교생이 298명이다)과 54명의 자원봉사자 그리고 5,934권의 책이 있다. 그리고 도서관을 관리/감독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나의 작은 ‘책방’은 이웃과 함께 하는 ‘도서관’이 되었고, 나는 도서관을 하는 목사로 알려졌으며, 우리 교회는 문화 콘텐츠가 훌륭한 교회로 소문이 났다.

나의 ‘책방’ 목회는 성업 중이다.

심방 목회

2008년 5월 부르심을 따라 경북 예천의 농촌 미자립교회로 부임했다.

첫 담임 목회에 대한 기대와 열정이 가득했고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도시교회에서 부목사로 지내던 때가 만 배 정도 편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안 아픈 곳이 없다는 어르신들에게 신유 안수 기도 릴레이를 매주 이어가야 한다. 한 달 정도 기도해 드리면 기도하지 않은 신체 부위가 없을 정도다.

8월 찌는 더위에 벽걸이 선풍기 3대에 의지해 예배를 드리면 설교하는 목사는 땀에 쩔고, 전교인 12명은 잠에 취한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설교하는 목사 혼자다.

이른 새벽 양수 터진 암소 뒤편에 매달린 송아지 새끼 머리에 손을 얹고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송아지 안수 기도는 애교다.

매일 오후 6시 10분 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셔서 “목사 양반, 나 ‘6시 내 고향’ 보게 테레비 좀 틀어줘.” 하시는 어르신들에게는 리모컨이 되어드려야 한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채널 9번을 틀어 드리다 보면 어느새 나는 KBS1TV ‘6시 내 고향’ 동네 리포터가 되어 있다. 여기에 인근 청송에서 꾸준히 찾아오는 그분들의 밥상 심부름과 여비 마련까지 마련해야 한다.

오랜만에 사회에 나와 집밥으로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시는 그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목사 양반이 아닌 우리 목사님으로, ‘6시 내 고향’  동네 리포터가 아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로 만들어 준 것은 ‘심방’이었다.

부임 얼마 후, 아내와 5남매를 데리고 동네 인사를 나섰다. 까만 비닐봉지에 귤 몇 개와 바나나와 라면 두 개씩 담아 집집을 다니며 새로 부임한 목사라고 인사를 드렸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빛으로 보시던 어르신들도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지나니 가족처럼 세세한 안부를 물으셨다.

이제 할머니들은 매일같이 채소와 나물을 사택 문에 걸어두고는 꼬부랑 걸음으로 바람같이 사라지신다. 할아버지들은 닭이며 토끼에게 줄 사료를 가져다주시며 교회 마당 밟는 것이 일상이 되셨다.

요즘은 목사님 인사받는 재미에 산다며 농담도 하신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절기에는 동네 경로당에서 헌금을 보내신다.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우리 교회가 동네교회이니 동네 행사처럼 생각하기로 했다는 기분 좋은 답변을 주셨다.

나는 농촌 목회를 통해 아무리 수고하고, 인내하고, 악한 것과 피 흘리는 싸움을 해서 승리하고, 모든 것을 견디고, 부지런히 목회해도 처음 가졌던 마음을 버리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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