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성경 120장 읽었더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성경통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
교회 오래 다녀도 변하지 않는 성도, 성경 읽으면 변한다

김일수 목사는 성경통독에 빠진 후 삶과 설교, 목회가 달라졌다. 하루에 120장씩 성경을 꾸준히 읽었을 뿐인데 말씀이 들리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말씀에 붙잡힌 그는 욕심도 내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인터뷰를 고사하다 은퇴 1년여 앞두고 어렵게 만나 그의 성경 통독 이야기를 들어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성경 읽기를 했나?

본격적으로 많이 읽게 된 것은 7년 전부터이다. 하루 10장 읽어서는 설교자로서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붙잡혀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사도행전 18장 5절,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씀을 읽었다.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했다. 하나님 말씀에 붙잡히면, 예수님께 잡힌 인생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하루 120장 정도 읽는다. 한 달에 한 3번 정도 1독을 한다. 성경이 1,189장이니, 열흘 정도면 읽을 수 있다. 1년이 365일이니, 1년에 36회 정도 통독하게 된다. 원래 새벽 4시 반쯤 일어났는데, 성경 읽을 시간 만들어야 한다는 감동을 주셔서 한 시간 일찍 기상하고 있다.

새벽 3시 반부터 아침까지 50~60장을 읽고, 나머지 오전, 오후 중에 30장 정도 읽는다. 저녁에도 기도하면서 30장을 읽는다.  관주나 해설 없이 말씀만 기록된 성경을 읽고 있다. 물론 의지만으로는 안된다. 말씀을 읽어야겠다는 감동과 도전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셔야 가능하다. 시간에 대한 ‘영적 다이어트’도 필요하다.

어떻게 읽는가?

성경을 통독하면서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통으로 읽으면 된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은 주석을 보고 해설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러다 보면 깊게 들어갈 수 없고 전체 맥락도 못 잡게 된다. 모르면 건너뛰면서 통으로 읽다 보면, 메시지가 필요할 때 깨달음을 주신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대로 읽는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냥 들으려고 해야지, 내 생각과 의지로 이해하려고 애쓰고, 궁금한 것을 해석하면 더 이상 나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첫째 단계가 주님께서 메시지를 주시는 ‘듣는 것’이라면, 다음 단계는 주님을 ‘보는 것’이다.

말씀에만 집중하면 안 되고, 그 말씀을 주시는 주님을 영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욥도 고백하지 않았는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주님의 임재와 체험, 살아계심을 경험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다. 요즘 ‘설교’라는 말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교리나 성경을 강의식으로 전하는 수사학의 틀을 깨버리고,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자연스럽게 나눈다.  

성경읽기를 통해 설교도 달라졌는가?

설교도 완전히 바뀌었다. 100독을 한 이후부터는 설교 원고를 쓰지 않는다. 어느 날, 설교를 준비하는데 ”열심히 준비하고 온종일 원고 써서 외쳐대면, 그게 네 말이지 내 말이냐?’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회개하고 도전을 받았다.

그래서 설교 전에 “성도들은 은혜받고 말씀 듣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고파서 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직접 만나 주십시오. 저는 그저 주님만 표현하고 드러내길 원합니다. 직접 말씀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니, 수사학적 기법이 들어왔는데, 서론·본론·결론, 예화와 대지 같은 수사학의 틀 속에 들어가면, 말씀이 힘을 잃어버릴 수 있다.

사실 설교자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신자들이 세상에서 복잡하게 살다 교회에 왔으니, 도입부를 재미있게 해서 감정을 건드려야 은혜를 받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 재미는 웃긴다는 게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제대로 들어가면, 정말 재미있다. 한 주간 동안 영적으로 체험하고 주님께 받은 메시지를 서로 간증하며 나누는 것이다. 

성도들도 예전보다 훨씬 은혜를 받는다. 한 시간 내내 원고를 볼 필요도 없고, 성도들을 보면서 대화하니 영적 관계가 형성되고 뜨겁게 은혜를 체험한다. 원고를 쓸 때보다 세련되진 못할지 모르지만, 훨씬 자연스럽고 은혜롭고 힘이 있는 것 같다.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읽으라고 가르치고 훈련할 텐데, 반응은 어떤가?

몇십 년간 교회를 다니던 한 집사님이 성경을 2번 읽고 3번째 읽었더니, “정말 놀랍습니다.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변하지 않았지만, 제대로 정독하니 내가 바뀌는 걸 느낍니다”라고 했다. 그런 간증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젊은 장로들도 성경통독 채팅방을 만들어 1년 3독, 2독 그룹을 이끌고 있다. 초신자는 1독을 독려하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제자훈련이다. 구역장 훈련 등도 성경으로만 하고 있다. 예수 안 믿던 사람이 오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새신자 교육 정도만 한다.

제자훈련 없이 성경만 읽어도 사람이 바뀐단 말인가?

그렇다. 경험상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해도 사람이 잘 안 바뀐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읽게 하니까, 사람이 바뀌었다. 성도들 간증이 그렇다. 내 자신을 봐도 그렇다. 성경 100독, 200독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바뀌는 일이다. 당장 아내에게도 요구하고 지적하는 일이 없어졌다. 자녀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트집 잡을 게 보이지 않으니, 잔소리도 없어졌다. 불평불만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편 23편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의 원래 깊은 뜻은 ‘아무 소원이 없다’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소원이랄까, 요구사항이 없어졌다.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말씀에 은혜를 받고 저절로 그렇게 됐다.

성경을 읽는 것이 우선인가, 기도가 먼저인가?

기도보다 성경 읽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둘을 같은 비율로 했지만, 지금은 말씀에 은혜를 받다 보니 사실 기도할 것이 별로 없다. 말씀이 믿어지고, 말씀을 보면서 기도가 절로 된다.

말씀과 기도의 경계선이 없어졌다. 기도는 아무리 많이 해도 자꾸 이기적이고 자기 욕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모르면 기도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지금은 말씀을 읽는 자체가 기도가 되니, 기도가 훨씬 더 편해졌다.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우선, 성도들이 긴장하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전에는 내가 닦달 좀 했는데, 지금은 일체 없다. 오직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을 붙잡고 이끌림을 받으라고만 하니 너무 편하고 좋아한다. 성도들에게 영적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니 행복해한다. ‘얼마나 모이느냐’에 대한 부담도 없다. 숫자에서 해방되니, 성도들도 해방됐다.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성경 읽기를 결심할 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그저 말씀 속에 붙잡히고 파묻히는 것이 가장 좋다. 처음엔 억지로라도 읽어야 한다. 조금씩 읽다 보면, 터닝 포인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는 말씀이 확 와닿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누가 코칭하거나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나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그 순간이 가장 황홀하고 행복해서, 성경에 빨려 들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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