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결단으로 수많은 광주시민 살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무력진압을 명령한 상부의 지시를 신앙의 양심으로 거부하고 수많은 광주시민을 지켜낸 성결인이 있다.

정웅 장로(중앙교회 명예)는 광주 31사단 사단장 시절, 폭도의 오명을 쓴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건 결단으로 이를 거부했다.

시민 생명 지키다가 강제 예편

“내 평생 그렇게 어려운 적이 없었습니다. 군 지휘관으로서 그런 어려운 입장에 놓이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상대가 적군이라면 적군을 패퇴시키거나 내가 전사하면 되지만, 상대는 적이 아닌 내가 지켜 온 광주시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판단인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긴박했던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정 장로에게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상부의 무력진압 명령을 받은 후 40분간 숨 막히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한 정 장로는 하늘의 계시처럼 세 가지 응답을 받았다.

첫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 둘째,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 말씀. 셋째 ‘너 하나 죽음으로써 사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는 영감이 번쩍 떠오른 것이다.

결국 계엄령 하에서 상부지시 불복종으로 사형당할 위험을 무릎 쓰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부하들에게 무혈진압을 명령하고 시민들을 다치지 않게 했다.

이 일로 인해 정 장로가 받은 대가는 컸다. 광주민주화항쟁이 유혈진압된 후 6월 4일 사단장직에서 해임되어 32년간 몸담았던 군에서 강제 예편됐다. 연령정년, 계급정년, 근속정년 어디에도 해당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정 장로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협박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정 장로는 좌절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언론과 정부의 태도를 개탄하며 광주민주화항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비상한 각오를 다졌다.

그런 각오는 11대 광주지역 국회의원 출마로 이어졌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폭도, 난동자’로 규정되었는데 이러한 오명을 씻어주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진상규명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광주시 동·북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 장로는 폭발적인 지지를 얻으며 두 번의 유세를 펼쳤지만 중도에 후보를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사무소를 차린 날부터 모처로 끌려다니며 사퇴를 종용받고 그의 플랜카드와 벽보는 훼손되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보안대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사퇴서에 날인을 강요받았다. 결국 아내 전성원 장로(중앙교회 명예)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중도 사퇴를 하게 됐다.

광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정 장로는 근로복지공사 부사장 자리를 제의 받아 재직하면서 다음 선거를 기다렸다. 그러나 12대 선거 때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입후보할 수 없었다.

6년 간의 근로복지공사 퇴임 후 민추협 부의장에 추대되었을 때는 자택에 7~8명의 괴한들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계속되는 위협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정 장로는 다시 광주에서 13대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당시 미국 유학 중 아버지의 선거를 돕고자 귀국했던 장남 정대균 장로(중앙교회)는 지구당 창당대회 홍보물을 나누어주다가 전경들에게 구타당해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수난과 어려움 속에 선거를 치른 정 장로는 당시 최다득표율, 최다득표수, 최다투표차라는 대기록으로 당당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의원으로 지낸 4년간 그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정치적 과제 해결에 불철주야 노력했다. 광주시민들의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 5.18 광주민주항쟁에 연관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는 민주인사들을 사면 복권시키는 일, 유가족과 부상자, 피해자 보상과 망월동 민주성지를 성역화하는 일 등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1988년 12월 광주민주화항쟁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소속 정당인 민주당 5.18 특위위원장을 맡은 뒤, 국방부에서 제출받은 20여 상자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심층 분석해 증인채택, 증인심문 요지 등을 소속 특위위원들에게 제공하며 5.18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 장로가 지난날 목숨을 건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정 장로는 국회의원 의정보고서에 크리스천임을 당당히 드러내고자 뒷면에 기도문을 싣기도 했다.

“주여! 이 나라가 정직과 진실을 바탕으로 사람의 능력을 정하게 해주시고 특히 80년 5월의 정신이 정오의 빛과 같이 길이 빛나게 해주소서...(중략)”

복음사역에도 헌신

13대 국회의원으로 혼신을 다해 일했던 정 장로는 의원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신앙생활에 몰두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중앙교회 노인대학인 늘푸른대학 학장을 맡아 섬기며 ‘믿음과 건강’에 대해 강의했다. 국내외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도 앞장서 선교적 사명을 다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정 장로의 믿음과 신앙은 오래전 작고한 부친 정종구 장로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정 장로의 집안은 장남 정대균 장로와 차남 정성균 장로까지 3대째 장로를 이어가고 있다.

정대균 장로는 30여 년 동안 유산균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경희대 유전생명공학과 교수다. 고 이만신 목사의 사위이기도 하다(부인 이현미 권사).

정성균 장로도 신한대학교 교수이면서 서울신대 서기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중앙교회 장학사업에도 일조하고 있다. 정웅 장로는 부인 전성원 장로와 함께 ‘5.18선교장학회’를 세워 어려운 형편의 광주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이후 5.18선교장학회를 모체로 하여 정웅 장로가 이사장을 맡은 한국기독교문화사업단이 출범했다. 한국기독교문화사업단은 교육·문화선교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또 교단 평신도대학원 1기 졸업생으로, 전성원 장로와 함께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2년 과정을 이수하는 배움의 열정을 보였다.  

올해 95세가 된 고령의 정 장로는 아직도 군인정신이 투철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가방 하나 들고 군부대를 찾아가 돕겠다”고 말한다. 군인처럼 ‘거수경례’하는 습관도 남아있다.

정 장로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나라의 통일이다. 지금도 밤마다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는 정 장로의 모습은 성결인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고 있다.

경력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복무기간  1949년 ~ 1980년)

1950~1953년 한국전쟁 참전

1980년 육군 제31보병사단장지휘 육군본부 작전참모국 차장

1980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

1981년~1987년 근로복지공사 부사장

1987년 민추협 부의장

1987년 김대중 대통령후보 선대본부 부위원장

1988년 제13대 평화민주당 국회의원

1995년 자유민주연합 당무위원 겸 특임행정촉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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