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아픔의 땅, 스블론과 납달리!

     하도균 교수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특이할만한 일이 마태복음 4장 13절에 나옵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고 기록된 구절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주된 장소가 유대나 고향 나사렛이 아니라, 이방의 땅이라고 불리웠던 스블론과 납달리였기 때문입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땅!’ 원래 이 명칭은 한 지역에 관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이 스블론이고, 라헬의 시종 빌하의 아들 이름 중 하나가 납달리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땅 분배 시, 스블론과 납달리가 분배받은 땅이 갈릴리 서쪽에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흘러 북이스라엘의 영향력이 쇠퇴하게 되었을 때, 앗수르와 바벨론의 영향력이 스블론과 납달리 땅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지리적으로 변방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침략해 왔을 때, 가장 먼저 침노를 당하는 땅이 그 땅이었고, 가장 먼저 전쟁을 겪은 땅이 그 땅이었으며, 가장 먼저 무너진 땅, 가장 먼저 노예로 끌려가는 땅이 그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키려고 발버둥 쳤지만, 힘 없이 무너져, 결국은 이방의 앗수르가 하자는 데로 할 수밖에 없었던 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땅은 눈물의 땅이고, 슬픔과 아픔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속사정은 알아주지도 않고, 남쪽의 혈통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유다 사람들은 스블론과 납달리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행해서 “너희는 앞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도 마! 너희가 살고있는 땅은 이방의 땅이야!”라고 비아낭 거렸지요.

실제로 스블론과 납달리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들어가는 당당한 부족의 이름이고, 그렇기에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지리적 위치와 자신들의 연약함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지고 무너져 노예로 끌려가 아픈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들이 처한 상황의 힘들고 아픔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은, 같은 동족들이 손가락질하는 비아냥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이루시며,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에 가서 사시며 그곳에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땅은 ‘흑암의 땅’ ‘사망의 그늘진 땅’ ‘버림받은 땅’이라고 성경은 표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깡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생명의 빛이 비추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는 땅에, 예수님은 생명의 빛을 비추시려고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그 갈릴리 지역에 가셔서, 특별히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에 가셔서 생명의 빛을 비추시며 공생애를 시작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는 어떤 소망도 없이 한평생 울면서 그들의 인생이 끝나버릴 수 밖에 없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평생 얼마나 힘들었니?’ ‘평생 얼마나 아팠니?’ ‘동족에게 비아냥거림을 들었을 때 얼마나 괴로웠니?’라고 물으시며 그들을 위로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로가 아니면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셔야 한다면 어디, 누구를 먼저 찾아가 시작하실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아니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아파하고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세상의 연줄도 끊어지고, 도움도 끊어졌으며, 세상에 어떠한 소망도, 미래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손을 내미시면, 예수님이 초청하시면 언제든지 그 손을 잡을 수 있는 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이 가장 먼저 찾아가시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쪽에서 울고 있는 형제가 있습니까?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성경은 다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예수님을 필요로한, 한 영혼 한 영혼을 보듬으면서 시작하셨습니다. 꼭 겉으로 눈물이 나와야 우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맺힌 눈물!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맺힌 눈물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였던 그들이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한 영혼을 위해, 예수님처럼 달려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금 이 시대는 필요로 합니다. 아니, 언제나 필요로 해왔습니다.

이제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가, 눈물과 아픔의 땅인 스블론과 납달리로 달려가면 어떨까요? 그것이 코로나 시대에 진정으로 복음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일이 아닐까요?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