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 너를 그렇게 처참한 죽음으로 내몬 양모를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법정선고를 보며 이미 하늘 사람이 된 너는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법정 밖에 몰려와 이 판결을 지켜보며 격렬하게 시위하던 전국에서 찾아온 엄마부대의 피눈물과 피맺힌듯한 절규를 보면서 넌 우릴 용서 할 수 있겠니?

태어나자마자 친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 시설로 맡겨져 아직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될지 알지 못하던 아이들. 허술한 입양 시스템에 의해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양부모를 만나 너무도 긴 고통의 터널로 들어가 속으로만 비명질러 왔을 너희들은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이 나라 헌법에 명시된 생명의 존엄성과 생존권 조차 지켜주지 못한 이 사회와 어른들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서 넌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사건이 일어나야 비로소 뒷북을 울리며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느라 국회에서 떠들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국민의 대표들, 자기들의 변명 늘어놓기식 논평하는 언론의 외식을 바라보면서 너희는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특히 오늘의 사회와 이웃들이 코로나19로 멘탈붕괴 직전의 병적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때,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발작을 보여 너희처럼 약하고 순진한 어린 싹을 짓밟는 짐승이 되어버린 그들을 넌 용서할 수 있겠니?

무엇보다 너희와 같은 처지였지만 좋은 양부모를 만나 의젓한 성인으로 성장시킨 고마운 분들, 평범하지만 대단한 일을 해내신 입양 가정의 부모님들의 헌신과 눈물, 땀과 기도를 보며 너희는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마음 아픈 것은 교회와 크리스천이 세상의 등대가 되고 촛불이 되어 희망이 되어야 했는데, 서서히 꺼져가는 흑암과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믿음직한 소리가 되고 기댈 어깨가 되었어야 했었는데, 세상 분주함과 안일함에 빠져 제대로 자기 역할을 못한 어리석음을 보며 너희는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주님, 우린 용서받기에 너무 멀리 와버린 건 아닌지요? 신명기에서 이미 율법으로 우리에게 엄히 말씀하시길,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가난한 자와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 범주 안에 들어가는 입양아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 손을 펴라” 이는 우리의 희생과 땀과 섬김이 들어간 헌신을 말한다. 이것을 행함으로 세상의 희망이 되고, 촛불이 되고, 등대가 되라는 의미이다.

신약의 야고보서에서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주님, 우린 참된 경건을 지키지 못했고, 고아와 미혼모와 입양아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불경건 자요, 위선자였습니다.

다가온 환난, 즉 어떤 경우에라도 잘 돌보라는 엄숙한 명령,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돌본다는 말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이미 주어진 의무사항이다.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명령이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위험한 환경에 방치할 수 있을까?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지 않겠는가? 설혹 실수하고 상처를 입히더라도 부모이기에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을.

세상은 다시 나른한 봄날의 깜박거리는 춘곤증같이 곧 이 입양아 학대범죄사건을 관심사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과연 누가 이 어마어마한 증상을 계속 경고하고 깨어있는 나팔수가 될수 있을까? 누가 자기 몸과 시간과 재정을 드려 이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 위임사항을 감당할까? 주님, 이 사악한 세상에서 거룩한 부모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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