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가 전하는 종말의 메시지(롬 8:19~23)
지금 교회 절기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회개하면서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에 신실한 성도들은 금식이나 절식을 하면서 오락을 금하고 말씀과 기도에 진력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교단적으로 생명의 피를 나누면서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헌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기후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탄소금식운동을 40일 동안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탄소금식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하려는 기도와 실천운동입니다. 우리가 지구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을 ‘고백’하고 지구의 아픔을 덜어주는 거룩한 습관을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운동입니다. 최근의 코로나 19사태는 우리에게 종말을 준비하라는 경고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생태계는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어 종말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번 기간은 은혜의 기간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지구촌은 잦은 기상이변으로 각종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습니다. 화산폭발, 지진, 태풍, 황사, 한파, 가뭄, 홍수, 코로나19 등. 우리가 당하는 생명의 위기는 인간이 인간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상황도 있지만,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다시 자연이 인간에게 재난을 가져오는 간접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폭력이 결국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되돌아옵니다. 코로나19도 인간이 자연을 학대하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원고갈, 대기오염, 수질오염, 오존층 파괴, 온실가스 배출,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로 지금 지구는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 위기는 문명이 가져온 위기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누리는 번영은 생태계 파괴의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입니다. 유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성장을 기한다는 인류의 꿈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의 자정 능력은 한계상황에 달했고, 자연생태계는 균형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세계자연기금(WWF)이 발간하는 <지구 생명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자원 및 에너지 소비가 1970년까지는 재생산능력보다 작았지만, 이제는 재생산능력의 50% 이상을 더 소비하고 있습니다. 야생동물의 2/3가 사라졌고, 전체 육지의 3/4, 바다의 40%를 심각하고 훼손했습니다. 서식지 감소로 동물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인수공통 감염병의 팬데믹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삼림 벌채의 빠른 속도는 새로운 코로나바이러스를 포함하여 동물 매개 감염 질병의 확산의 주요한 원인입니다. 지구상의 삼림은 1초에 2천 평방미터씩 파괴되고 있고, 이와 함께 생태계가 재생 불능 상태가 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빙하가 사라지고 있고, 동토의 땅이 녹으면서 이산화탄소 배출로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서 멸종되었던 동물의 사체들이 드러나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깨어나 전대미문의 질환과 전염병이 돌게 되었습니다.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의 방출이 계속 증가하면서 지구 기온 상승이 가속화됨으로써 가공할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단절이 얼마나 깊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세계에서는 고통과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지경인데도 인류는 엄청난 군비를 지불하면서도, 전 생명권(biosphere)이 처한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19절에서 23절까지 피력한 바와 같이, 피조물들이 인간의 탐욕 때문에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마치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종노릇에서 해방해 주기를 갈구한 것처럼 이제 모든 피조물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자연 만물이 예언자가 되어 인간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생태주의적 신앙고백에 있어서 근원적인 틀을 제공해 줍니다. 창조 기사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사는 만물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세계를 하나님 중심의 관계성 안에서 고안하며, 외부 구조에서 내부 내용을 채우는 방식으로 창조 작업이 진행됩니다. 개별 생명은 더 큰 의미의 콘텍스트 안에서 서로 연관되어 설명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성, 만물의 상호 관련성이 나오면서 이 모두는 생명공동체(Community of Life)를 이룹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친족 관계를 이룹니다. 창조 과정에 있어서의 연속성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연대성과 친족의식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만물은 근본적으로 친척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동일한 생명의 그물망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동물의 일종이며), 자연과 별도로 존재하는 외부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로 구성된 생태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와 공생적인 세계입니다.
생태계의 위기는 무엇보다 ‘가치의 위기’입니다. 작금의 상황을 볼 때, 오늘을 위한 신학과 신앙고백에는 창조-생태주의적 세계관이 담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가져온 우리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창조-생태주의적 세계관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합니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도구적 사고에서 공생적 사고로, 진보주의 사고에서 한계선 존중의 사고로, 물질주의적 가치관에서 생명적 가치관으로,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공동선 존중의 사고로, 단기적 사고에서 장기적 사고로, 성장 위주에서 성숙으로, 탐욕적 인생관에서 절제의 인생관으로,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윤리적 책임을 배제하는 과학에서 윤리적 책임을 자각하는 과학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로부터 인간성에 기여하는 기술공학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에서 자연과 공생하는 산업으로, 합리성․정확성․효율성을 중시하는 것에서 상상력․정감․인간성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창조 기사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인간은 인간 이외의 세계인 대지, 바다, 대기, 식물, 물고기, 동물과의 적절한 관계에 있어야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그리고 자연만물과 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살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한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창조론은 성속(聖俗)의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하나님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성의 연장선상에 존재합니다. 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자연에 대해 절대적인 입장에 섰던 인간은 상대적 위치로 물러나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자입니다. 기술 문명 이전의 원시적 자연주의와 같이 자연이 절대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기술 문명 이후의 현대적 세속주의처럼 인간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6일 즉 ‘같은 날’에 생물, 육축, 짐승,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과 동물을 모두 흙을 재료로 하여 만드셨습니다(창 2:19). 본래 ‘아담’은 지구, 표토, 땅(adama)을 의미합니다. 흙과 짐승과 인간의 연속성과 연대성을 보여 줍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는 식물, 동물, 인간은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친족 관계(kinship)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온 생명’(global life)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체를 이룹니다. 생태학의 기초는 엔트로피의 법칙인데, 생명계 순환이 중요합니다. 생명체는 물순환, 대기순환, 생물순환을 통하여 온전한 생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황금 사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인간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특별한 역할과 소명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더불어 인간의 책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오직 인간만이 생명을 경외할 수 있는 지혜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높은 지위에 따른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높은 존재이므로, 동물을 최대한 세심하게 보살필 수 있고 보살펴야 하며,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동물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고 베풀어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생명의 지킴이입니다. 생명의 지킴이가 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덕목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연대성을 깨닫고,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들기 위한 생활양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생명 앞에 겸손하게 서로 섬기며 양육하고 돌보는 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과 통치권은 억압과 착취가 아니라 양육과 돌봄에 대한 책임으로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인간의 ‘다스림’은 지배와 통치보다는 조화로운 생활이며, 여기에서 주어진 명령은 하늘, 땅, 바다 세 영역의 대표적인 생명체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것이며, 28절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땅에 충만하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인간의 통치권은 관리자, 보호자, 후견인, 보존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생태주의적 청지기 또는 창조 청지기(creation stewardship)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다스림’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종종 잊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다스리며 지키라’는 명령은 히브리어로 보면 ‘섬기고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보호자, 관리인, 보존자로서의 청지기 의미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는 청지기로서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인간의 통치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권위 아래서 위임받은 책임입니다. 청지기직은 모든 형태를 가진 생명과 모든 자연 자원에까지 확장됩니다. 청지기직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과 다른 피조물들의 안녕에 대한 관심을 포함합니다. 청지기 정신은 돌봄과 책임의 윤리입니다.
자연을 인간에게 주어지는 실용적인 가치를 따라 평가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환경관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주는 유용성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자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모두는 각각 자신의 목적을 가지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지어진 세계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가치평가는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 우주 중심적이고 생명체 중심적입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단절과 자연재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홍수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실제적 서술입니다. 홍수 심판의 생태학적인 재앙은 인간 타락의 결과입니다. 노아 방주에 함께 거주하였던 생명체들을 작은 우주로 생명종의 연대성과 다양성을 보여 줍니다. 홍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은 인간과 동물들이 공동운명체로서 언약의 파트너도 되고 구원의 동반자도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의 대상과 무지개 언약의 범위에는 인간뿐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과 함께 맺은 무지개 언약으로 상징되는 생태학적 계약에는 미래 세대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과 자연 만물이 함께 누릴 구원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지혜문학 전통에는 ‘성례전적 우주론’(sacramental cosmology)이 들어 있습니다. 이 우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성경은 자연을 신격화하여 자연신이나 다신론으로 빠지지 않지만, 자연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표현된 위대한 작품으로, 신비로운 것으로, 경탄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에 드러난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과 영광과 온전함을 알 수도 있습니다(행 14:17, 롬 1:20, 시 19:1, 104편).
생태계가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신학의 많은 개념들이 재해석되거나 그 의미가 확장되고 수정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생태계의 보존과 생존을 위한 새로운 신학과 윤리의 기초를 마련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면 하나님과 세계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여기에 대안으로 샬리 멕페그(Sallie McFague)가 제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몸’(Body of God)으로서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보이는 자기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주와 동일시되거나 우주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에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협을 받으신 것처럼, 우주의 몸이 되신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몸, 즉 세계를 보살필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몸인 우주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며 조심스럽게 돌봄을 받고 양육되어야 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몸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개별 신자의 삶이나 신앙 공동체의 생활에 국한하여 사용하거나 오순절, 카리스마적 은사와 연관 지어 언급하므로, 모든 만물에 거하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마크 월러스(Mark Wallace)의 ‘녹색 성령론’(green pneumatology)에 보면 성령은 생명의 숨이요, 치유의 바람이며, 생명의 물이며, 깨끗하게 하는 불로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고 보존하고 새롭게 하는 생명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모든 피조물에 내재하십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생명의 우주적 에너지로 만물 가운데 내재합니다. 이것이 우주적 성령론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 생명 중심, 우주 중심으로 회심해야 합니다. 죄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로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탈하고, 역시 자연의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생명체 간의 소외와 분리가 죄의 현상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상호관계의 단절과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죄와 회개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생명(live)을 역행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악(evil)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죄는 인간에게서 끝나지 않고, 자연 만물도 인간의 죄의 고통을 당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과의 중보자적 자리에 위치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제사장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중보자 역할도 잘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죄의 목록에는 자원을 낭비하거나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것, 분리수거 안 하는 것, 생태계를 남용하는 것들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드리워진 죽음의 문화 전반을 향하여 죄의 개념도 확대 적용해야 합니다. 생태학적인 죄는 땅을 독점하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몸인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을 돌보거나 사랑할 책임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생명이 서로에 대한 상호의존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욕망입니다. 죄는 우주라는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신학이나 설교나 예전이 창조의 교리보다는 구속의 교리에 더 강조점을 두었고, 구속은 창조의 완성(the fulfillment of creation)이 아니라 벗어남(an escape from creation)으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결여한 구원론은 오늘날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헌할 수 없습니다. 창조된 질서의 단절과 소외 그리고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논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예언적 비전은 인간뿐 아니라 창조물 전체의 조화, 온전함, 평화를 말하기 때문입니다(호 2:18, 4:3, 롬 8:22, 골 1:16-17). 미래 창조의 회복과 치유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재 우리 행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또한 새로운 신학은 종말론과 생태학의 화해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바울이 로마서 8장 22절에서 23절까지 복음을 생태학적으로 해석할 때 이미 드러났습니다. 현재 창조세계의 연속선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우주적 조화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형을 보듯이 만물이 함께 어우러져 지내는 우주적 구속의 희망을 키워가야 합니다. 구약의 가족 개념은 종, 가축까지 포함하는 확대된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마 12:48) 라고 언급한 대목도 역시 확대된 가족관을 피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약동하였고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치유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괴된 생명의 회복, 그리고 생명의 매트릭스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부활을 통해 피조물들을 고통에서 풀어 주고 풍성한 생명의 힘에 결합시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여, 피조물들의 고통과 연대함으로써 부활의 새 생명을 부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주어지는 적색은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창조 때 하나님이 베푸신 처음 은총은 녹색은총이었습니다. 녹색은총은 원초적인 은총이었고, 적색은총은 죄에 빠진 인간을 회복시키는 이차적인 은총입니다. 녹색은총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드러났고, 적색은총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창조주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은 녹색은총과 적색은총을 우주 만물에게 베푸십니다. 물론 타락한 현 세상에서는 적색은총이 녹색은총을 되살려내게 해야 합니다. 구속은 창조에 이바지합니다. 구속은 부서지거나 강탈당하거나 불완전한 피조물들의 생명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하는 반 창조적 세력들에 맞서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은 만물에 깃든 잠재적인 생명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적색은총과 더불어 녹색은총을 전파해야 온전한 복음이 됩니다. 녹색은총은 우리가 자연의 희생을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자연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창조 영성의 핵심은 녹색은총을 힘입는 것입니다.
생태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교제의 장소로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만물이 서로 만나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자연 만물의 성례전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례전은 하나의 예전으로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를 역동적으로 경험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례전에 쓰이는 빵, 포도주, 물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성례전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는 자연을 신격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생명을 허락해 주는 물질적 재화들 속의 생명으로서 성례전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성례전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하여 육체, 물질, 세상을 경시하는 이원론적인 경향을 극복하도록 도와줍니다. 성례전에 쓰이는 물은 자연이 베풀어 준 것인데, 기도하므로 죄를 씻기는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포도주, 빵은 대지와 식물과 햇빛과 공기가 준 것을 인간이 땀 흘려 지어 만든 것으로 예수의 몸과 피가 되어 참된 생명을 전해 주는 은혜가 됩니다. 성찬에서 음식은 우리를 예수의 희생과 고난으로 연결시켜 줍니다.
안식일 준수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창조-생태학적 세계관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종이나 나그네, 육축, 들짐승, 토지까지 확대하여 함께 누리게 하는 우주적인 복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종이나 짐승까지도 노동으로부터 휴식을 가지게 하는 공동체를 위한 사회윤리이면서 생태윤리까지도 포함합니다. 안식일 규정에는 가족의 개념이 아들, 딸에게서 남종, 여종, 나그네, 육축까지 확장됩니다. 여기로부터 인권과 동물권(animal right)에 대한 생각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이웃을 향한 공간적인 확장에 그치지 않고 시간적으로도 확대되어 안식년, 희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것이 계약법 전통을 이룹니다. 안식일은 새로운 도덕 공동체의 질서와 자유를 실제 시간과 공간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과 창조의 복을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쉽니다. 안식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창조의 리듬을 유지하게 합니다. 안식은 창조를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고, 완성해줍니다(창 2:2, 출 20:8, 10).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노동도 거룩해집니다. 안식일 준수가 노동을 은혜 되게 합니다. 안식은 모든 생물권(biosphere)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안식년에는 휴경하므로 대지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레 25:1-5). 여기에서 대지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성경적인 안목을 볼 수 있습니다. 오염, 폐수, 무분별한 개발로 대지를 약탈하거나 남용하는 것은 대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대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대지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보호되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무시해왔던 자연생태계의 중요성과 자연신학과 녹색 은총을 되돌아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인류 즉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청지기직의 온전한 회복을 이루라는 것이 오늘 여기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합니다. 코로나19의 아픔들은 우리를 창조 목적으로 되돌리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우리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중추를 옮길 때 생명의 하나님께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이제 기독교는 이 땅에 생명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운동을 통하여 사회생명력을 복원하고 사고, 질병, 재난, 전염병, 심판으로부터 이 땅을 구해야 합니다. 이 일에 모든 교회와 교단 그리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2021년 사순절은 탄소금식을 통하여 우리 안의 욕망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우는 ‘경건한 40일’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