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가 살아야 아이들 신앙도 산다

# 지진이 일어난다. 모래지반층의 모래 입자들이 재배열된다. 모래 입자들 사이의 틈에서 기존보다 강한 수압(水壓)이 생기게 된다. 수압으로 땅 밑에는 빈공간이 생긴다. 주변의 지반이 무너져 내린다. 지반침하 현상이다. 건물이 무너진다. 이를 액상화(液狀化)라 한다. 코로나가 우리네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기존질서는 무너져 내렸다. 교회도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이 다가왔다. 뉴노멀(New Normal)이다.

# 소크라테스 시대, 역병이 기승을 부렸다. 기원전 431년이다.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만 명이 쓰러졌다. 역병은 아테네 전통사회를 해체한다. 1300년대 초,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페스트가 시작된다. 1340년대 말 유럽으로 확산됐다. 비단과 향료를 실어 나르던 실크로드가 페스트를 실어 나른다. 아이러니다. 유럽에 상륙한 페스트는 1351년까지 유럽 전체 인구의 30~40%를 몰살시킨다. 중세 유럽은 페스트로 초토화된다. 그리고 또 다시 코로나19, 재탄생을 촉구한다. 탈피(脫皮)하라는 거다. 뱀은 허물을 벗지 않으면 죽는다. 교회도 가정도 그렇다.

# 집합금지 명령으로 비대면 사회가 일상화되었다. 비대면의 장기화로 출근과 회식은 사라진 옛말이 될 것인가? 아니다. 비대면이 아닌 ‘선택적 대면의 시대’가 왔을 뿐이다. ‘회식’이 지고 ‘홈파티’가 뜬다. 출장으로 멀리 떠나 있거나 가정 밖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어머니가 가정으로 돌아온다. 재택근무가 늘면서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고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가정과 일터가 하나가 된다. 그렇게도 꿈꾸던 ‘저녁이 있는 삶’이 다가온다. ‘물이 밀려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갈망했던 ‘저녁이 있는 삶’이 일상화된 지금이야말로 ‘삶이 있는 저녁’으로 전환시킬 절호의 기회다. 드디어 가정사역의 번성기가 왔다. 탈피해야 한다. 

새벽기도 대신 저녁기도로
화재가 난다.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무엇일까? 갓난아이와 노부모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비망록(일기)이 되고 집문서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보물은 있다. 분명 화장품이나 밍크코트, 커피 잔, 밤새 읽었던 책은 아닐 터다.

종교개혁이란 거대한 불길이 타오른다. 구교(가톨릭)에서 탈출할 때 거추장스런 것은 다 버려둔다. 딱 한 가지를 집어 든다. 무엇이었을까? ‘저녁기도’였다. 저녁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잠과 죽음은 일심동체였다. ‘영면(永眠)’은 ‘깨어날 수 없는 잠’이고 잠은 ‘깨어날 수 있는 죽음’이었다. 아니 종말신앙이었다. 눈 뜨지 못하는 순간이 주님의 품에 안기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은 하루를 야무지게 살아내는 게 참된 신앙이었다. 그 하루가 모여 영원이 되는 거고.

개신교는 그 소중한 보물을 버렸다. 큐티(Q.T)는 열심히 가르친다. 온갖 큐티 상품들로 넘쳐난다. 중보기도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어쩌다 잠드는 저녁의 기도는 사라져 버렸을까?

다행히 성공회 신자들은 하루 네 번 짧은 기도 시간을 갖는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들과 지키는 이들과 슬피 우는 이들과 함께 깨어 계시고, 잠자는 모든 사람을 주님의 천사들이 지키게 하소서. 아픈 사람들을 돌보소서. 주 그리스도여, 피곤한 자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괴로워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자들의 방패막이 되소서.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을 위해 하소서. 아멘.”「성공회 기도서」 중.
‘새벽기도는 져도 저녁기도는 뜬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정예배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자
비대면 사회가 가져다 준 선물이 영상예배다. 처음 한 두 번은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는 담임목사가 신기했다. ‘우리 목사님도 TV에 나오네.’ 교회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유튜브와 줌(zoom)을 찾았다. 그러다가 모두들 홈 쇼핑족이 되었다. 리모콘으로 설교자를 고른다. 이제는 설교도 ‘구독’한다. 
기호식품을 고르듯 제각기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입맛을 따라간다. 신앙의 편식현상이 가속화된다. 가족은 따로국밥 신세가 된다. 한 지붕 세 가족 네 가족이 된다.
시간이 가면 악마에게도 길들여지는 것이 사람이다. 점점 교회의 대면예배가 귀찮아진다. 코로나 시대의 모니터 예배에 꾸역꾸역 길들어간다. 그러면서 어느새 설교를 모니터링한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병원의 환자가 아니라면 제발 모니터를 끄자. 가정예배가 답이다.

도우게비츠(Dowgeiwicz)는 말한다. “유대교는 어느 시대의 박해에도 살아남았다. 종교적 생활의 실질적 구성과 기능이 모두 가정 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수많은 회당들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그 선조들의 신앙에 대해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언제나 가정에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정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환대하기 위해 구별된 작은 성소(聖所)였다.”

가정기도회를 강조했던 루터는 예배를 갱신하면서 가정예배의 실행을 강조한다.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해 부모들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우뚝 서야 한다. 교회는 가정예배 교육을 통해 가정을 세워야 한다. 가정예배는 1:1 맞춤형 신앙과 기도교육이 가능한 시스템이 된다. 성(聖) 가정의 실현이 있다.

주일학교 대신 가정학교를 세우자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이 있다면 주저 없이 ‘요리문답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튜 헨리는 요리 문답서를 이렇게 평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모아 정리하고 그 진리와 율법이 사람들에게 친숙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고안된 형식의 건전한 말들이다.”

진리의 언어는 의외로 따스하고 인격적이며 경건하다. 어린아이까지도 이해할 만큼 쉽고 간결하다. 저절로 경탄(敬歎)이 나온다.

랜슬롯 앤드루스는 “요리문답이 교회에서 떠나자 교회는 곧 어두워졌고 무지로 뒤덮였다”고 탄식했다. 그 원인이 무얼까? “그 모든 어두움은 요리문답 교육이 사라진데 있다” 존 머리의 지적이다. 

대소요리는 기독교의 「기초 聖문법」과 같다. 어릴 때부터 이뤄진 요리문답 교육은 아이들이 자랐을 때 삶과 신앙의 네비게이션이 된다. 지금 주일학교는 초토화되었다. 신앙교육은 본래 부모 몫이었다. 학원이 생기면서 학원에다 자녀를 맡긴 것처럼 ‘주일학교학원’에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맡겼다. 이제라도 가정으로 되찾아올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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