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25, 26)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음에 민감해야 합니다.
고난주간 성 금요일에 하필이면 그토록 충성하시던 우리교회 명예장로님께서 부음을 입으시어 고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부음이었기에 가족은 물론 교우들도 의외라 싶어 당황하였습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고난주간이었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장로님의 부음의 슬픔이 겹쳤기에 많은 장례식을 목도하고 집례하였던 목사인 저로서도 인생의 죽음에 대해 깊이 고뇌해보는 심오한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단어가 적절한 표현이고 용어일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또는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첫째 의학 또는 생물학자의 판단은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중단되면 죽었다고 합니다.
둘째 경제학자가 보는 정의는 생산수단 또는 소득창출이 없을 때 죽었다고 합니다. 또한 실직자, 파산, 해고 등을 목이 잘렸다와 밥줄이 끊어졌다고도 합니다.
셋째 법률학자가 보는 견해는 호적이나 주민등록부에 사망이라고 기재된 여부가 생사의 기준이며, 사망신고나 말소신고가 서류상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죽은 사람에게도 피선거권 투표 안내통지가 배달되기도 합니다.
넷째 윤리학자의 견해로는 어떠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과 가족 그리고 이웃들에게 신용이 떨어지게 되어 아무도 그를 믿어 주지 않을때 그 사람은 죽은 목숨 아무개는 매장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죽는 길도 여러 가지가 있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무엇입니까. 건강여부나 돈이 있고 없음,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냐 동행이냐의 여부를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성도들이 부흥집회를 앞두고 이번 기회에 죽어가는 아무개를 살려야 하는데, 건져내야 하는데 하는 절박한 아쉬움의 말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불통의 상태이기에 이를 안타까워하며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과 단절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생기 가운데 함께하여 주셔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분이라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어 영원토록 죽지 않는 보장을 받는 성도이며, 죽음 가운데서도 초연하게 할렐루야를 선포하며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신에게 다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