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스(Jay. E. Adams)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편의 설교를 통해 도달하려는 목표가 무엇인가로 보았다.

이해하기 위한 주석 작업에 충실하지 않은 채 ‘의미’파악을 주목적으로 하는 ‘묵상’으로 달려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설교는 부실한 공사가 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숭고한 본문의 의도 파악을 기초로 설정되는 설교의 목표는 간 데 없고 설교자의 목적만이 설교를 이끄는, 릭워렌식으로 표현하자면 ‘목적이 이끄는(?) 설교’가 되기 마련이다.

어떤 설교자는 자기의 사상을 전하는 도구로, 혹자는 자신의 신학을 전하는 통로로 설교를 이용한다. 이런 경우들은 흔히 ‘해석’이 ‘사실’을 넘어서는 경우이다. 사실 신학과 사상에 의해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고전 15장의 설교에서 부활을 ‘빈부 격차 없는 밥상공동체의 실현‘ 혹은 ’모든 영적 물질적 저주로 부터의 해방‘ 등으로 해석한다면 이 두 설교자의 극명한 해석 차이도 문제지만 이들의 해석이 본문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하기 마련이다.

본문보다 앞서가는 해석은 ‘말씀’이라기보다는 ‘자기 의견’일 뿐이다! 목적에 의해 설교가 곁길로 가는 경우는 가장 심각한 경우는 설교가 교회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설교의 자리는 교회의 예배이다. 그 예배에 참석한 성도가 설교의 대상이다. 따라서 설교는 제도나 기구로서의 교회가 아닌 모임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성도를 지향하는 것이 설교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놀랍게도 이런 본질은 교회 현장에서 제도로서의 교회 유지와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근한 예로 교회건축이나 총동원 주일을 앞에 두고 설교자들은 해당 주제에 대해 몇 주 간에 걸친 시리즈 설교를 하곤 한다. 이런 경우 그 설교가 교회성장을 위한 인위적 도구인지 순수한 하나님 말씀의 전달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설교가 제도로서의 교회를 위해 순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설교가 의도된 전략이 되는 것은 설교본질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의도한 효과를 거두지도 못한다. 전도를 설교한다고 전도가 되지 않고 건축헌금을 설교로 강조한다고 헌금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자발성의 원리위에 서 있고 인위적 계산이 아닌 평상시의 은혜로운 말씀 만이 바로 이 자발성을 구축한다. 교회를 위한 설교를 벗어날 때 진정 교회를 위한 설교는 가능하다.

설교가 교회부흥의 전략에서 떠나 진정이 느껴지는 은혜의 장소가 될 때 비로소 성도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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