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대지를 흠뻑 적셔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재촉했습니다. 봄이 되면 움츠렸던 생명이 기지개를 펴고 봄의 향연을 준비하느라 분주해 집니다. 어김없이 올해도 농부는 봄이 오는 소리에 바빠졌습니다. 씨 뿌리는 계절이 왔기 때문이죠. 봄비와 더불어 파종해야 되기에 심술궂은 꽃샘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심은 대로 거둔다’ 는 법칙을 우직하게 믿고 농부는 때를 놓칠세라 눈코 뜰 새 없이 뜁니다.
지난날의 성패에 연연하지 않고 올해에 희망의 징조가 안보일지라도 농부는 다시 시작합니다. 어쩌면 어리석음에 익숙해 진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농심이지요. 농심은 삶으로 체득한 노하우이며 하나의 배짱이지요. 아프리카 선교사요 탐험가인 리빙스턴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고비를 새로운 시작의 분기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봄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갈수록 고령화 되어가는 농촌을 보며 어느 언론에 이 시대 마지막 농사꾼 이라는 타이틀로 노인정에 모여 있는 어르신들을 화보에 실은 것을 보았습니다. 퇴역 장군 맥아더의 연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는 말을 연상케 했습니다. 지금 농촌을 지키는 노병들이 사라지면 누가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까?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는 “나라를 지키는데 육, 해, 공군이 있어야 하지만 농군이 있어야 한다. 농군이 없으면 어떻게 육, 해, 공군이 있을 수 있느냐”하며 생명에 에너지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군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농군을 양성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농부를 보면서 씨뿌리는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뿐 나지 아니할까 염려 하지 않습니다. 땀 흘려 가꾸면서 가을의 결실을 기대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합니다. 농심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영혼 구원에 시급함을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추수 때의 농심의 안타까운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이 약동하는 생명의 계절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농심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특수선교를 위해 농사꾼 목사를 자청하여 야콘농장을 세워 농사를 지은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뭐 하나 이룬 일이 없어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떤 분이 ‘호미신학’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해비타트운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망치신학’이라면 농사를 짓는 일은 단순한 노동 같지만 호미신학이라 말해 주었습니다. 호미신학은 바로 농심이라 말할 수 있지요.
토레이 말처럼 “노동이 기도고 기도가 노동이다”. 노동을 통하여 깊은 영성을 체험하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직한 농사는 농심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주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고 농부의 인내를 말합니다. 인내하는 것이 농심입니다. 농사꾼 목사가 몸으로 쓰는 사도행전은 봄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