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총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세상에는 이제 막 봄이 찾아왔지만 정치판은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있다. 어느 선거든 치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각 진영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고 있다. 선거가 과열되다보니 토해내는 말도 살벌하다.
후보들의 눈빛에는 적개심이 가득하다. 무차별 폭로도 서슴지 않는다. 당선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태세다. 그들의 전쟁터에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 정의와 공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진영 논리’가 만물의 척도다.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다.
정치판에 드리워진 핏발 선 분노는 미움으로 가득 찬 민심이 반영돼 있어 보인다. 20, 30대 젊은 층에는 정치판을 갈아보자는 심정이 깊이 배여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이 땅에는 해마다 50만 명의 젊은이들이 사회에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이 가운데 10% 정도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 나머지는 백수 아니면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 지식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고용 없는 성장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세대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하급 공무원이라도 할 수 있었다. 절약하고 저축하면 내 집 마련도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9급 공무원 시험조차도 경쟁률이 200대 1이 넘는다. 지원자 중에는 박사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이러니 젊은 층에서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내게 해 준 것이 뭐냐‘고 일갈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는 정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이 필요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용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터져 나온다.
반면 50대 이상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만한 나라를 만든 사례가 세상에 또 있느냐고 반문한다. 살만한 터전을 일구는 데는 땀과 눈물이 필요한 것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도 시도도 해 보지 않고 남의 탓을 하고, 좌절하고 포기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젊은이들의 분노와 좌절을 자양분으로 삼아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려는 정치 세력에 강한 거부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러한 세대 간의 뚜렷한 성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정치는 개인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치권력이 만들어 내는 정책과 법안 하나하나가 나와 가족과 일터의 이익과 자원을 많게 또는 부족하게 배분하게 된다. 그래서 정치는 중요한 것이고, 좋은 일꾼을 뽑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이 증오로 요동을 치고, 국민들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감정에 편승해 선거에 임한다면 정치의 순기능은 그 순간 사라지고 만다. 정치가 악해지면 공의로운 세상, 관용과 배려가 살아있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자 많은 유대인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그 땅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면서 예수를 죽일 것을 선동한다. 정치가 악해지면 이런 엄청난 모의도 가능하게 된다.
선거에 임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정치가 사회의 성격과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나와 내 집단의 이익을 위한 생존 투쟁의 전쟁터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존재가 상호간에 인정되고 어울리는 아늑한 공동체로 만들 것인지는 선량을 뽑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