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독일의 오토 한과 스트라우스 만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성질을 규명하기 위하여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실험을 강행하였다. 우라늄에다 중성자를 적중시켜 조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두 물리학자도 놀랄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원자핵이 믿을 수 없는 힘과 속도로 분열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여파가 2012년에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로 나타날 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 1939년, 양자역학의 기원을 마련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하이젠버그는 옛 친구인 시카고대학 교수, 물리학자 엔리고 페르미를 미국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염려했다. 젊은 물리학자 한과 만이 발견한 원자핵 분열의 과정이 폭탄 제조나 에너지화 등에 이용될 수 있음을 예감했던 것이다. 이미 유럽은 전쟁 중이었지만 조국을 버릴 수 없었던 하이젠버그는 자신을 ‘흰 유대인’으로 지칭하며 핍박하는 나치 독일행 귀국선을 타야만 했다.

▨… 1945년, 하이젠버그는 한을 비롯한 여러 명의 독일 과학자들과 함께 영국 케임브리지 인근의 특별 가옥에 갇혀 있었다. 우려했던대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는 다 끝나가는 전쟁 막바지에 비무장의 평민들의 주거지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순식간에 20만 명 이상을 살상한 일이 인류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 1955년, 아인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한 11명의 저명한 물리학자 및 인류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과 함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 서명한 이틀 후에 심장병으로 쓰러졌고 일주일 후에 타계하였다. 그는 독일이 먼저 원자탄을 만들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탄 제조 예산을 빨리 책정해주도록 요청하는 서한에 사인했었다. 이 사실을 괴로워하면서 그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참여했던 것이다.

▨… 현재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핵폭탄의 위력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히로시마 폭탄의 1000배 이상이다. 우라늄의 평화적 이용의 상징이 원자력발전이지만 후쿠시마 원전의 비극은 체르노빌처럼 인류의 재앙이 되고 있다. 인간은 몰라도 좋았던 것들을 굳이 알려고해서 파멸의 길을 자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악과 이야기가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살아있음을 핵안보정상회의는 염두에나 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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