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기웅 청년

21살 청년이 된 이기웅은 신명기 28장을 읽던 어느 날, 민족의 구원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결과로 나라가 일본에게 망하게 되었다고 깨달았고 민족복음화에 대한 열망에 불탔다. 동시에 그는 우리 한민족을 강제로 지배하는 일본의 불의함에 더욱더 항일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1940년 이기웅이 충남 서산읍에 있는 상춘학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은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고, 그 대신 일본어 상용화 정책을 우리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조선어 교육을 강행했다. 결국 그는 일본 경찰과 학무 당국에 불려가 엄한 문초를 받았다. 그런 압력에도 이기웅이 굴복하지 않자, 일본은 그를 상춘학원 교사직에서 해임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그러던 중 그는 감시를 피해 1941년 12월 초, 강원도 설악산으로 입산하였고, 지원병과 학병을 피하다가 소위 태평양전쟁 선전포고를 접하고 1942년 2월 보신책으로 충남 보령 어업조합에 취업하여 중국망명의 기회를 꿈꾸기도 했다.

피신생활을 하면서 그는 진지하게 우리 민족의 현실을 염려하였다. 우리 민족의 희망은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는 민족의 살길은 하나님을 믿는 길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민족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시대의 모든 상황이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왔던 것이다.     

1943년 4월, 이기웅은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한지, 1개월이 지난 5월에 재림신앙 문제로 교수 전원이 일경에 체포 구금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 이날을 기해 전국 성결교회의 목회자들이 일제히 구속되었고 자동적으로 경성신학교가 폐교되고 말았다. 이기웅은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와 서산성결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는 교회 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청년들에게 반일감정을 불어넣었다. 청년들이 모이면 기도하였지만, 교제하는 시간이 되면 시국을 논하고 일본에 대한 성토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는 이때 “내가 일본의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의 울분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청년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평소 교회를 감시하던 일본 경찰이 낌새를 채고 교회로 들이닥쳤을 때 그는 급히 몸을 숨겨 겨우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피신지였던 당진에서 서산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그는 안녕질서 문란과 보안법 위반, 육해군 형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6개월간 구금당한 채 취조와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일본 경찰의 험악한 공포분위기에서 심문을 받으며 청년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 무엇인지를 추궁 당했다. 다행히 수사 과정에서 ‘총독부 폭파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 내용이 들통 나면 사형내지는 중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 “일본 천황은 사람이다.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패망할 것이다.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외쳤다. 그는 중형을 선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밤마다 일본 경찰의 고위층을 만나 술을 대접하고 돈을 건네며 아들의 감형을 계속 간청했다. 아버지의 이런 노력이 통했던지 그는 홍성 재판소에서 1년 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45년 3월, 공주 형무소를 출옥했다.

그는 해외 망명을 도모하고 은신하면서 농민들에게 해방과 독립의지를 전하고 다니다 1945년 8월 15일 당진에서 감격의 광복을 맞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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