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의 독립운동 기념사업

이상철 목사가 성직자로 헌신한 이후 그의 사역 과정에선 독립운동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복음사역을 하면서 효과적인 독립운동도 했다는 견해도 있다.(傳統과 時論. p.145)

첫째, 많은 외국인 선교사에게 한인의 독립 열망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신학생들에게 숙식을 같이 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둘째, 독립공채모집을 효과 있게 전개했다. 최영택 장로와 같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교인들, 동향 출신인 동화약방(현 동화제약) 사장과 세브란스 병원장 이영준 박사, 철제병원장 등에게 독립공채를 인수하게 했다. 셋째, 동양선교회 상무이사, ‘활천(活泉)’ 주간으로 있을 때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고 그의 장남 이병희 집사는 다락방에 감추어놓은 공채를 목격했다고 한다.

이상철 목사의 독립운동사는 그의 소천 반세기가 지나도록 알려지지 않다가 1983년 애국지사 김은수·김달문의 ‘이성철 목사의 유족을 찾아 그 은혜에 보답하라’는 유언에 따라서 김은수의 장남 김주보가 이상철 목사의 장남 이병희 집사를 찾아와서 ‘독립운동사료집 제5집’ 3·1운동 재판기록에 명시된 증거서류를 제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이병희 집사 주선으로 ‘애국선열 이상철 목사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발기되었고 1990년 12월 26일에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93년 8월 28일 대구광역시 광복회관에서 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 씨 문중의 토지 1000여 평 대지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애국선열 이상철 목사의 제60회 기일’에 애국선열 이상철 목사 기념문집에 대한 원고가 수집되어 1997년 1월 15일에 ‘애국지사 이상철 목사 기념문집 위원회’가 조직, 1997년 12월에 ‘기념문집’이 출간되어 1997년 12월 20일에 현풍성광성결교회에서 61주기 추도예배 및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이상철 목사는 처음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복음의 사자로 변신하여 한국성결교회 초창기 교단의 근착과 성장 발전을 위한 막중한 실무에 혼신을 다해 헌신하다가 순직했다. 이 목사가 장수했다면 그는 일반의 예측대로 이명직 목사의 후계자가 되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고대 천재들이 흔히 가던 길이도 했다.

이상철 목사는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바쳤던 그의 정열을 성결교단 창건에 이바지하여 교단의 성장 발전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아까운 인물이어서 하나님이 그를 잔혹한 일제에 더는 시달리지 않게 하시려고 데려가신 것일까. 무섭게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는 더 이상 일본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나라로 떠났으니 그날은 바로 성탄절이었다.

이상철 목사에 대한 길보른 총리의 평가. 이문현 목사의 조사, 이건 목사의 영결식 설교, 이준수와 유기태 목사의 추모사, 오영필과 진성열 목사의 조시, 김종률 목사의 추모한시(追慕漢詩) 등을 통해 그의 위인 됨이 드러난다. 그는 철야기도, 일일 완전 금식기도를 일삼은 기도의 모범적인 용사였다.

그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천국 곳간에 바쳤고 궁핍한 생활비 중에서도 십일조, 구제 사업에 헌금한 실천적인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모든 언어행동이 경건하고 신중하여 성결의 생애를 나타낸 사람이다. 깊이 기도하고 자기를 가다듬는 생활을 했으며 모든 일에 말은 적게 하고 실천에 철저하여 성도의 모범을 보여줬다.

“이상철 같은 인물만 우리교단 사역자가 된다면 우리 단체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길보른 총리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성서학원 원장 이하 모든 강사의 칭찬을 받았으며 같은 반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볼 수 없으되 당신의 거룩한 희생과 충실한 언행을 보아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예수를 보았노라”고 유기태 목사는 추모사에서 이상철의 인품을 회고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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