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우리 지방회에 계시다가 서울로 가신 목사님은 언제나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시는 유쾌한 분이셨다. 처음 안수를 받았을 때 농담 삼아 그분이 나를 부르신 호칭은 1호봉이었다. 그 말속엔 지금은 좀 서툴고 부족해도 접어주시고 지켜 봐 주시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그 별명이 정겹고 편안했다. 1호봉 목사였던 나는 낮은 호봉 덕에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의 보호와 배려 속에 별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잘 달려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 지방회는 여느 지방회와는 달리 이틀을 이어서 지방회를 갖는다. 첫날 회무가 끝나고 하루 숙박을 하며 교제의 시간을 갖는데 참 필요한 시간인 듯하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목회자들이지만 또한 각자 사역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동역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위로와 쉼을 얻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밤 시간, 우리 방에 잠시 머물다가 인사부와 심리부의 면접을 끝낸 여전도사들이 좋은 말씀을 듣기 원한다고 다시 방으로 쳐들어왔다. 몸은 피곤하지만 어려운 사역의 길에 들어선 그들을 위해 한 방에 계시던 선배 여자 목사님이 밤 11시까지 그들에게 시간을 할애 하셨다.
매년 둘만 같은 방을 쓰며 지냈지만 과묵한 그분과 그렇게 긴 시간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데 이번에 그 전도사님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쏟아지는 기회였던 것 같아 행복했다. 마침 나 혼자 안타깝게 기도하고 있던 문제들을 다 아시는 것처럼 들려주시는 말씀들이 때맞춰 내겐 얼마나 귀한 향유가 되었는지 모른다.
둘쨋날 회무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자기가 속한 지방회를 자랑하겠지만 유독 화합과 단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 지방회의 회무는 정말 은혜롭게 진행된다. 신앙과 인격이 훌륭한 지방회 어른 목사님들이 계셔서 때론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잘 정리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둘쨋날 끝부분에 가서 그야말로 썰렁해지는 분위기가 꼭 한번씩 연출되는데 총회 대의원 투표시간이다. 안수 10년 이상 된 목사들에게만 주어지는 투표권 때문에 그 시간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르지만, 안수 10년 미만인 목사들은 알아서 그 자리를 피해주게 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모두들 자기 사역지에선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돌보는 자로 인정된 목사들인데, 사리 분별 못하는 어린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투표권이 없는 만 19세 이하의 새파란 청춘들도 아닌데, 왜? 어찌하여 그 자리에서 내몰려야 하는지 씁쓸하다 못해서 서러워지려고 하니까 문제다. 그야말로 총회까지 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독배도 마셨는데 무슨 소리 하는거냐? 법이니 무조건 순응하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1호봉의 꼬리표를 달고 열심히 헉헉대며 달려왔지만 아직도 10년을 채우려면 갈 길이 먼 6호봉 목사는 투표가 진행되는 회의장을 빠져 나와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지나던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이 쌩하고 콧등을 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