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경성성서학원 편입학

독립운동의 불길이 대구 달성을 중심으로 경북 전 지역에 확산되자 일경은 이 사건에 수사력을 총집결하였고 김달문과 김은수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인하여 이상철이 독립운동 배후세력의 주동자임이 드러났고 이상철은 일경의 추적이 심해지면서 거점을 현풍교회당으로 하면서도 숙소를 자주 변경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더욱 확산되면서 일경의 수사가 집중 강화되었고 동지들의 독립투쟁이 제약을 받게 되자 수사의 초점을 흐리게 하기 위해 이두산 장군이 위장 자수했다. 하지만 오히려 독립운동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국내주동자가 이상철임이 재차 판명, 이상철이 은신한 교회 기숙사가 경북수사대의 급습을 받았다.

마침 철야 기도하던 성도들의 도움으로 이상철은 담을 넘어서 유가면 금동 생가의 창고로 급히 피신했다. 이 창고는 곡물 500석을 쌓을 수 있는 창고였고 창고에는 때마침 추수한 볏섬으로 꽉 차서 공기 통풍용 창문에 쌓아놓은 볏섬을 치우고 피신처를 만들었다. 일경이 수차례 볏섬을 마구 쑤시며 그를 찾았으나 가족 친척 주민들의 지혜로운 대처로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열악한 환경의 창고 안에서의 삶을 그에게 극도의 건강악화를 가져왔다. 이상철은 창고 피신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운동을 위해 외사촌 형 최두영을 통해 동양선교회 카우만 선교사에게 연락한 후 상주복장으로 변장하고 대구를 벗어나 경성성서학원을 찾아갔다. 

동양선교회 선교사들과 경성성서학원은 혈기 방장한 청년 독립운동가를 일본 경찰로부터 보호해주었고 이상철은 카우만 선교사의 환대로 외사촌 최두영의 이름으로 편입학했다. 성서학원은 당시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치외법권지역이기에 지명수배 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철이 평양신학교 2학년 재학 중임을 고려하여 1921년도에 편입학하여 1922년도에 성서학원 제11회로 졸업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성서학원 학감으로 시무토록하는 등 동양선교회는 그의 신분을 보장해주고 보호했다. 이상철은 남은 여생을 한국성결교회의 성직자로 헌신했다.

이 목사가 조국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피신하여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 후에는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하여 오직 성직에 헌신하고 매진했다. 이상철은 성서학원 학생시절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여 진리탐구에 열중했다. 성경의 각 인용구절을 연구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그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그는 오후 6시 경과 밤 10시가 되면 강당이나 빈 교실을 찾아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때로는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했다. 그는 40일 금식대부흥회가 개최되었을 때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여 죄의 뿌리를 여지없이 십자가에 못 박듯이 철저하게 회개했다. 그 때 성서학원 전체에게 성령의 불이 불붙기 시작하여 이상철은 중생, 성결의 은혜를 받고 신유 재림의 신앙까지 가지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와 성서학원 교수들의 칭찬과 신임이 한층 더 두터워지며 교단의 큰 기둥으로 성장되어가고 있었다. 이상철 목사는 이러한 은혜체험이 분명했기에 성서학원 졸업 즉시 ‘활천’편집에 종사했고 학원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성경연구에 열중하고 기도에 더욱 진력하여 그를 실천도덕자로 평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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