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은 시적이고, 성서강해는 성시였다

그의 마지막 아홉 번째 은혜는 그가 아군을 따라 후퇴할 때였다. 아군폭격기가 교량마다 폭파하여 중공군 진입을 막을 때, 그가 다리를 건넌 후에야 다리가 폭파되어 구사일생했고 남한에 와서 북한에서 못다 한 성역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로 경상도 김천교회에서 목회할 때 남한에 먼저 온 3남매를 모두 만날 수 있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피난신학교가 개교하자 그는 교수로 부름을 받아 부산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서울신학교도 서울로 와 건물을 수리했고 그도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설교가 은혜롭고 문학적이어서 상도동교회 목회까지 겸임했으나 나중에 양자택일하라는 총회의 명령에 교역자양성이 더 소중함에 따라 교수만 전념했다.

그의 학문은 교수 역할에 전념할 때 빛을 발했다. 성경을 잘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그의 원전에 가까운 강해는 은혜와 깊이, 영감이 있었다. 전에는 받은 성결의 은혜를 전도에 힘썼으나 이제는 은혜가 내밀화되어 학문의 깊이로 승화됐다. 손에 항상 책이 들려 있고 지식이 풍부해서 그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란 별명도 얻었다.

북에 처자를 두고 남하한 목사들은 기다리다 지쳐 모두 재혼했으나 오직 성결교회 목사로 그만이 독신으로 살았다. 1961년 회갑잔치를 자녀들이 준비할 때 그가 만류했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어미와 여동생 둘이 있는데 어떻게 회갑잔치를 하니? 그날은 울음잔치가 될텐데….”라고 했다. 문이호는 또 믿음 소망 사랑을 늘 강조한 생활신조로 자녀들을 잘 키워 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다.

또 그는 가난한 신학생과 개척교회를 돕기 위해 사산회(四山會)를 조직해서 회비로 도왔다. 사산회는 뜻이 같은 평안도 출신의 목사들의 호를 붙인 것으로, 김홍순의 해산, 박용현의 소산, 이용선의 평산, 문이호의 익산이었다. 모두 소천한 후에 선행이 드러나 감동을 남겼다. 그는 65세에 교수직을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계속 교역자를 양성하다 1974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하신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영감이 깃든 시를 짓는 성자다운 그의 모습을 이 땅에서 볼 수 없게 되어 그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무척 안타까움을 주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문이호 목사가 소천한 후, 그가 ‘성시(聖詩)를 쓴 한국인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문학연구회가 편찬한 오늘의 고전시리즈(9)에서, 1986년 신규호 시인이 편집한 ‘한국인의 성시’에서 그가 신구교를 망라한 성시의 작가로 각인됐다.

총 12부로 편집된 유명한 시인들, 김광수, 윤동주, 박두진, 김현승 등과 함께 140여명의 시인들이 발굴됐는데, 그의 ‘예쁜 자를 부르신다’ 외 6편이 제9부로 단독 편집되었다. 신규호 시인에 의하면, “문이호의 시는 전통적 시의 형식을 밟지 않고 산문형태를 띄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성서에 토대를 둔 조사법(措辭法)도 매우 독특하고 비유와 상징도 개성적인 것이 주목을 끈다”고 했다. 그의 시를 지면상 여기 몇 줄만 소개한다.

예쁜 자를 부르신다(1)/ 팔레스틴에는 겨울에 비가 온다. 감정의 침울함과 혈기의 폭풍에 비애의 장마는 간데 없고, 양춘가절을 맞이한 때라. 양심이 추운 듯이 떨던 그 사선은 이미 넘은 때요 심령이 동결에서 해방된 때로다. 우수와 공포의 빛 내리고, 새 땅에서 생명의 싹이 틀 새로운 시대로다. 이때를 신생시대라 할 것이니, 주님은 이런 예쁜 자를 부르신다. 새 생명을 받은 예쁜 자여, 부르심을 받거든 나오시라.(아가서 강해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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