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의 체험과 청소년 야학

1944년 여름이었다. 이때는 일제 말기여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 승리를 위해 전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에는 승승장구했으나 1944년에 들어서 전투마다 패배하기 시작했다.

군인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21세의 징집연령을 24세까지 연장해서 일본과 한반도의 청년들을 무차별로 징집했다. 그래서 23세인 남영호에게도 징집영장이 나왔다.

1944년 여름부터 한반도에는 무서운 폐결핵이 무서운 돌림병으로 나돌았다. 남영호가 어디에 갔다 오다가 소낙비를 맞은 것이 화근이 되어 앓아눕기 시작했다.

의사가 왕진을 와서 주사를 놓고 약을 주고 갔지만 차도가 없었고 열이 40도를 오르내렸다. 평소 신유은사가 있는 부친 남 목사가 손을 얹고 기도했지만 낫지를 않고 계속 숨이 넘어갈듯 헐떡거렸다.

징집일이 되어 청년들은 모두 입대했지만 남영호는 병이 들어 입대하지 못했다. 일본의 경찰이 그를 기피자라고 체포하러 왔으나 얼굴이 핼쑥하고 숨이 헐떡거리며 곧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갔다.

경찰은 의사를 만나 진단서를 첨부하여 그를 병약자로 처리했다. 남영호는 의식이 혼미한 중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했다.

“하나님, 부친이 목사 되라고 했지만 나는 목사 자격이 없어서 불순종했습니다. 부친이 헌 양복 하나만 입고 다 떨어진 구두 한 켤레 만 신고 목회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내가 돈을 벌어 장로가 되어 부친의 옷과 구두를 사드린다고 결심했는데, 옷도 사드리기 전에 이렇게 부르십니까?” 그는 벽을 마주하고, 뜨거운 눈물로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하늘의 천사들이 그의 주위를 돌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그는 천사들의 노래를 들으며 차츰 의식이 돌아왔다. 깨어보니 가족이 둘러앉아서 부르는 찬송소리였다. 그는 점점 힘을 얻어 스스로 일어나 앉았다. 가족들이 놀랐다. 신유의 역사, 기적이었다.

이 신유의 체험을 통해 그는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뜨거운 신앙의 길로 매진했다.

1943년 12월에 성결교회가 해산되면서 남영호는 부친을 모시고 김천으로 가서 정착했다. 매일 부친이 인도하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선배인 여일심 장로가 상무로 있는 경북청과주식회사에 들어가 일하여 가족을 부양했다.

그의 근면하고 성실하고 재치 있는 명철함으로 일을 처리하여 경북청과회사는 전국적으로 명성과 신용으로 소문난 큰 회사로 성장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는 맨 먼저 폐쇄된 남산성결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리고 남산교회 출신 황성주 목사를 교역자로 모시고 교회 부흥에 앞장섰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혼란스러웠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학교에 못가고 거리를 방황하며 못된 짓을 했다. 교회에 몰래 들어와 교회의 기물을 훔쳐가기도 했다.

교회직원회에서 남영호 집사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교회가 청소년 교육에 힘써야 한다며, 청년회에서 그들을 야학과 신앙을 교육하기로 했다. 그는 교회 안에 사무실을 터서 교실을 만들고 교회 입구에 ‘남산야간학교’ 간판을 세웠다. 그리고 퇴근 후에 청년들과 시내를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을 모아서 빵 같은 것을 함께 먹은 후, 교회 청년들이 한 과목씩 맡아서 매일 가르쳤다.

“아는 것이 힘”이라며, 주로 한글과 산수와 기초영어를 가르치고 성경과 음악도 가르쳤다. 그들이 30명이나 되었고, 나중에 그들이 정규학교로 진학하여 공무원, 간호원, 군인 장교와 교역자까지 된 사람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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