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4:21)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악습 중의 악습인 카스트제도를 없애기 위한 종교로 기독교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 유학시절 교회를 찾아가기만 하면 자신과 같이 예배드리기를 거부하는 영국 신자들 때문에 그는 영영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채, 죽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개 때문에 교회 다니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주 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주님을 도구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니라 도구이고,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교회 건물을 자랑하기 급급하고, 교회 음향시설에 막대한 돈을 들인 것을 뽐냅니다. 우리가 뽐내고, 자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인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본문인 요한복음의 말씀은 18절에서 20절까지가 제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21절에서 24절까지는 모든 믿는 자와의 관계에 대한 교훈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조금 있으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인 너희들은 근심하게 되나, 세상은 도리어 기뻐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근심할 일이 아니라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고 너희는 나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말씀의 뜻은 결국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본다는 말입니다. 오늘 21절의 내용 중 ‘그에게 나를 나타내라’는 말씀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씀이 “나의 부활을 나타내는 신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나타내는 신자는 어떤 신자입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킵니다. 부활을 드러내는 모습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또 주님의 부활을 드러내는 삶은 부정의 삶이 아니라 빛을 향한 삶, 긍정의 삶이요, 죽음을 향한 삶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요즘 예배를 보면 어떤 교회는 우리의 소중한 찬송도 부르지 않습니다. 부흥을 위해서라면 찬송도 버리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흥이 넘치는 교회, 좋아하는 복음성가만 은혜롭다고 고집피우는 신자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가사로 치장된 복음성가를 부르는 찬양단이 넘쳐나는 교회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의 참 모습은 사라진 채, 예수의 부활은 증거하지 않고, 여흥만 즐기고, 주님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기쁨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고 거짓으로 가르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심으로 예수님을 나타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예수를 나타낼 것’이라고 정했습니다. 제목이 상당히 무례합니다. 오늘 제목은 사실 메모나 혹은 명령으로 쓰는 접미어와 같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나타내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임을 분명히 알기에 여러분에게 무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자체가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를 위한 희생 이후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과 같이 희생하고 헌신해야만 그 의미가 생깁니다.
예수를 나타내는 생활은 말씀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를 나타내는 생활은 우리의 성숙함과 진보를 드러내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나타내는 생활은 우리의 가치가 생명에 있음을 깨닫고, 그 귀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쓸 때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