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때문에 장로교에서 쫓겨나 성결교 목사 되다

중생체험을 한 그는 마음에 평화와 기쁨으로 살았다. 어서 아이들에게 이 귀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 주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주일 아침이 그는 다니던 장로교회에 환한 얼굴로 일찍 갔다. 그런데 주일학교 예배가 시작되기 전, 담임목사가 그를 목사의 방으로 불렀다.

“문 집사. 성결교회는 이단인데 왜 그곳에 갔습니까?”, “저는 은혜 받아 중생했는데, 이단이라니요?”, “자네가 학교 선생을 했다면서 그걸 모르나? 신앙은 지식이지, 감정이 아니란 말일세.”, “지정의를 고루 구비해야지, 지식만 가지고는 참된 신앙이 아니지요.”, “뭐? 이제 자네가 나를 가르쳐? 모르고 갔다면 용서할테니 시말서를 쓰게.”, “은혜 받아 충성하려는데, 웬 시말서입니까? 전 못 씁니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예배 시간에 목사는 “문이호는 이단집회에 참석했으므로 집사와 교사직을 파직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가 막혔다. 이제 은혜 받아 진짜로 교회에 충성을 하려는데 이 무슨 시험이란 말인가? 그는 교회를 뛰쳐나와 집에 가서 울면서 기도했다. “주여, 이제 주님을 알고, 주님 은혜에 보답하려고 결심했는데, 이 무슨 시험입니까?” 그가 기도 중 고읍성결교회가 환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은혜를 받았던 고읍성결교회로 달려가 주일예배에 참석하였고 목사와 신자들이 뜨겁게 환영했다. 이때부터 문이호는 평생을 성결교회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

그는 주일학교의 부장을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예배 후에는 신자들과 같이 집집마다 찾아가서 전도지로 전도했다. 또 저녁예배 한 시간 전에 전도 팀의 노방전도에 참여해서 소리쳐 찬송을 부르고, 전도설교도 했다. 그래서 감동 받은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 저녁예배에 참석하게 하여 손들고 예수를 믿게 했다. 그는 이 순간이 너무 기뻐 춤을 추었다. 그의 신앙을 지켜보던 목사가 ‘교역자로 헌신하라’고 권고했다. 또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부르심을 깨닫고, 문이호는 1935년 나이 35살 때 서울로 가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전교생이 기숙사에 입사해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새벽기도는 말씀으로 은혜 받아 기도를 뜨겁게 했으며, 수업시간에는 교수의 성경강해에 학생들은 그저 아멘, 아멘의 연속이었다. 은혜의 충만 속에 공부하던 그는 어느 새벽기도에서 성결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이명직 교장의 말씀에 도전을 받았다. 즉 자범죄는 회개하고 중생해서 사함을 받았지만, 죄악의 쓴 뿌리인 원죄가 있어 가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성결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에 그는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집중 기도해서 마침내 성령의 불을 받았다.

그는 속에서 솟구치는 전도하고 싶은 힘을 견딜 수 없어 수업이 끝난 저녁에 친구들과 전도 팀을 조직해서 길에 나가서 열심히 노방전도를 했다. 그의 전도설교에는 힘이 있어 사람들을 감화시켜 많은 사람들을 결심하게 했다. 수요일과 주일저녁에는 노방전도로 결심한 사람들을 인근 교회로 인도해서 교회에 등록하고 구원을 받게 했다. 참으로 기뻤다.

첫 여름방학을 맞아 그는 고향 근처 도시인 의주에 가서 작은 창고를 빌려 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놓은 후 길에 나가 노방전도를 혼자서 했다. 그의 힘 있는 설교에 감화 받은 사람 6명이 첫 신자로 등록했다. 이 교회가 피현교회였다. 그는 고향에 가서 가족을 데려왔다. 때로는 동네 깡패들이 나타나 방해하고 주먹을 휘둘렀으나, 순교자 스데반이 생각나서 참고 매를 맞았다. 그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깡패 중에 한 사람이 감화 받아 신자가 되기도 했다. 피현교회는 이런 고난 속에서도 무럭무럭 성장했다. 성령의 역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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