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는 사람들의 행보는 지난 해, 지지난 해, 더 오래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분주하기만 하다. 보신각의 종소리에 운집한 군중들은 세상이라도 뒤집혀진 듯 발을 구르고, 동해의 일출에는 무슨 올림픽에서 승리라도 얻은 양 박수치며 환호한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데, 오늘의 해가 바로 어제의 그 해인데, 오늘은 어제를 잊어야할 때란 듯이 희희낙락이다.

▨… 상가 지하 사글세 교회에도 새해는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밀린 사글세가 몇 달 째인가를 손꼽아 보는 담임목사는 무릎 꿇고 엎드린 채 ‘주여!’를 외친지가 몇 시간째인가는 아예 잊어버렸다. 새해에는 그래도 무엇인가 달라지겠지 하며 막연한 기대에 젖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외줄기 눈물조차 이제는 감추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곱씹는다. 사글세가 전세로 확 바뀌는 성령의 바람은 불지 않는가 하고.

▨… 프롬(E. Fromm)에 의하면, “희망이 일단 잃어버려지게 되면 생명은 사실상으로나 잠재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한다. 즉 희망은 생명의 구조와 인간 정신의 원동력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 절망에 내던져졌다는 것은 주검의 상태라는 것이다.

▨…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새해 희망은 무엇인가? 새해 우리 교단의 표어는, “전도바람, 성령바람, 성결바람 불어 부흥성장하는 성결교회”이다. 표어가 표어로서만 끝난다면 그것은 희망이 될 수 없다. 그 표어가 살아서 상가 사글세 교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때라야만 희망이 될 수 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사태가 빚어진다면 우리 교단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 시인 천상병은 꽁꽁 얼어붙었던 한강의 녹음에서 바다로 향하고자 하는 강물의 희망을 보았다(천상병·희망의 한강). 교단의 50퍼센트에 이르는 미자립 교회들은 달력의 표어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사글세 걱정으로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손길에서라야만 희망은 움틀 수 있다. 희망이 깨어졌을 때 그 결과는 파괴와 폭력이라는 프롬의 경고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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