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땅의 남은 사람들에게 ‘무소유’를 가르친 법정이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월드컵 4강이라는 도대체 기대할 수 없었던 횡재 앞에서 전 국민이 정신줄을 놓고 환호하던 때였다. 미국의 한국인들이라고 다를까. 마치 세계 축구를 호령이라도 하게 된 듯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런 뉴욕의 한인들에게 법정이 조용히 물었다. “한평생 몇 번이나 둥근 달을 볼까요?”하고.

▨…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 1957)가 물었었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모든 가슴이 부르짖고 있는 그것이며, 모든 두뇌가 혼돈에 부딪칠 때 묻고 있는 그것이다.(카잔차키스·어두운 심연에서)” 전도자도 물었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하고.

▨… 세모에 서면 누구나 삶이란 참으로 덧없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무슨 연유일까. 그 덧없음의 무게가 살아온 세월에 비례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증명한 바 없는데 공공연하다.이 또한 무슨 조화에서일까.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것이 삶의 이치임을 모를 리 없으련마는 세모에만 서면 둥근 달을 몇 번이나 보았느냐는 물음에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일까.

▨… “당신의 세월은 흘러 지나가지 않아서 오는 시간이 가는 시간을 밀쳐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월은 그것이 다 지나가 없어지면 그것으로 모두 끝이 납니다. 당신의 세월은 ‘하루의 날’이지만 그날은 지나가는 매일이 아니요 항상 ‘오늘’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내일에 의해 밀려나지도 않고 어제를 뒤따라 좇아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오늘은 영원이고 하나님의 영원은 곧 하나님의 현재다. 한 해를 마감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인간의 한계 탓이고 부족함 탓이다. 그러나 그 한계, 그 부족함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면… 세모에 서서 안개처럼 전신을 감싸는 회한에 젖는 아픔이 없다면 하나님의 오늘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내일의 희망이 되는 일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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