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문이호(文履浩)는 21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10월 20일 평안북도 용천군 동하면 상인동, 돌고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집이 위로 딸만 둘을 두었다가 오랜만에 아들을 낳은 부잣집이기 때문이다. 그의 20대 할아버지는 고려시대 중국에 갔다 돌아올 때 붓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와 한반도에 퍼뜨려 따뜻한 무명옷을 입힌 공로로 충성공이 된 문익점으로 문이호는 그 후손이었다.

대대로 부농으로 살아온 그의 부친 석환 씨는 천재여서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탁지부 주사로 있으면서 일본의 명치유신처럼 조선을 개화하려는 개화파 박영효와 친한 사이였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이 일본군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고종을 옹위한 후, 민씨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원세개의 2천명 청군에게 패해 3일천하로 끝나자 정변의 주역들이 일본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따라서 석환 씨도 벼슬을 버리고 평안도, 함경도로 조선의 관원을 피해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됐다.

이호는 부친을 닮아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살에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우는 족족 다 외우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는 자라면서 명심보감과 사서삼경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1910년, 그의 나이 10살 때 조선이 일본에게 합병되었고 서당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훈장과 학생들이 모두 통곡, 서당도 문을 닫았다.

며칠 후, 10여 년간 숨어 다니던 부친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러움을 잊고 오랜만에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의 따사로움을 느꼈다. 그는 몸이 많이 약해진 부친에게서 한글을 배웠다, 한문보다 배우기가 훨씬 쉬운 한글이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글이라는 말에 그는 더 열심히 배워 며칠 만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등 한글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공부의 흥미와 문학적 교양을 넓혔다.

1914년 그가 15살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한양(서울)으로 데리고 갔다. 선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그는 부친으로부터 서울에 유학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이 태어나면 제주에 보내고,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지. 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간?” “예, 사람은 큰 한양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 맞았다. 그래서 너를 한양에서 공부시키려고 지금 가는 거야. 공부를 잘 할 자신이 있지?” “예.”

그는 부친을 따라 남대문 역에서 내려 인력거를 타고 중동(中東)고등보통학교에 갔다. 당시 고등보통학교는 오늘의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이다. 그는 간단한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제1학년에 입학했고, 제복도 맞춰 입고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정해 학교에 다녔다.

그는 새로 배우는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수학과 과학에 흥미가 있었다. 그가 본래 총명하였지만 어학에 단연 뛰어나 일본어나 영어는 남보다 앞서 갔고,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과학시간은 그에게 많은 놀라움을 주었다. 세상은 자기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신기했고 그는 학급에서 우등생의 반열에 들어 자주 편지로 부친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었다.

그가 18살이 되던 1919년 1월, 그는 부모가 짝지어 놓은 동천군수의 손녀딸 장영숙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해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사건에 참여하여 용천읍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보름동안 유치장에서 고초를 겪다 집에 오니 병약한 부친이 돌아가셨고 그는 불시에 가장이 되어 가정을 돌보느라 학교를 5학년으로 중퇴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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