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서울신대 학생들을 이끈 전도활동

천세광은 성결교회재흥총회 의장으로 성결교회 재건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는 성결교회 재건이 마무리 되자 미련 없이 지방으로 다시 떠났고 성결교회 부흥을 위해 힘썼다. 목포교회에서 시무하면서 호남지역의 전도에 주력하였고 제주교회 개척에 박차를 가하다가 천안, 대구, 통영, 부산에서 목회했다. 그는 각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헌신의 사역으로 교회를 튼튼히 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에는 십자군전도대 재조직에 참여하여 제3대 대장(隊長)을 맡아 충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원주, 안동, 의성, 보촌, 묵호 등에 교회를 개척했다. 열정의 사역으로 그는 36년간의 복음사역 기간 동안 결신자 총 7만6294명과 교회개척 38곳 등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천세광 목사는 전도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는 신학생들의 노방전도현장을 지도하며 성결교회 부흥과 성장에 공헌했다. 당시 서울신학대학 기숙사 장학생들은 1주일에 한차례씩 노방전도를 하여 4학점을 받아야했다.

노방전도는 10~15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저녁시간 총회본부와 중앙교회가 위치한 무교동과 다동거리 주변에서 진행되었다. 천 목사는 신학생과 함께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강권하여 총회본부 소강당에 모아놓고 전도 집회를 열었다. 주로 상급생이 사회, 기도, 전도 설교를 하였고 신학생들은 참석한 사람에게 예수 믿기를 결신하도록 권면하였다.

당시 무교동 다동은 장안의 환락가여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세광과 신학생들이 전도를 하는데 어느 때는 바삐 오가는 사람을 붙들고 “예수 믿으시오!” “교회에 갑시다!”라고 말하면, “지금 바쁘니까!” 하며 좋게 지나간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예수 믿으시오. 교회에 갑시다”라고 말하면서 계속 접근하면 그때는 “지금 교회 갈 시간이 없어”라고 짜증난 소리로 언성을 높인다. 비켜가다가 다시 접근하여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이 새끼 비키라니까!”라고 고성 욕설과 어느때는 주먹이 날아오기도 하도 발길질에 정강이가 차여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은 철석 뺨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수차례 수모를 당하면서도 천세광은 저녁마다 학생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하며 그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악전고투의 영적전쟁에서 경찰서장 부인이 예수를 믿게 되는 등 전도의 성과도 생겨났고 그의 헌신은 많은 학생들에게 감동을 남겼다.

그는 1962년 병석에서 요양하기까지 복음전파에 주력했다. 6·25 동족상잔으로 인한 남북분단을 가슴아파하던 천세광은 지금이라도 이 민족이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면 북방의 적군들을 퇴치하고 남북통일의 고려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통일론을 역설했다. 그러나 1964년 2월 28일 서울의 자택에서 이 민족의 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천세광은 하나님과 이 민족을 유별나고 뜨겁게 사랑했다. 그의 생애는 민족과 교회를 위해 헌신적이었고 이 둘을 무리 없이 조화시킨 성결교회 역사에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헌신과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결인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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