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교회 위한 헌신

천세봉은 6·10만세사건에 관련되어 1개월여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성서학원에 복학하여 1928년 졸업했다. 부흥운동가 이성봉 목사와 김정호 김연옥 한인업 목사 등이 그의 동기였다. 그는 성서학원 재학 중인 1927년 조치원교회 전도사로 파송된 것이 목회의 시작이었다. 1933년 4월 조선예수교성결교회 제1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4년 제2회 총회에서 일본 도쿄 한인성결교회 담임목사로 파송 되었으나 4개월 후에 곧 귀국하게 된다. 그가 급히 귀국하게 된 것은 6·10만세 사건의 전력으로 인해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간섭을 받은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는 도쿄교회에 부임하기 전 김해에서 시무할 때 문서선교를 통한 민족복음화와 민족의식 구현에 주력했었다. 그가 편집한 계간지 ‘영남성보(嶺南聖報)’는 갑자기 일본으로 파송되자 일본에서 등사판으로 발간했다.

잡지의 내용 대부분이 경남지역 성결교회 소식과 목회자들의 원고로 되어있지만, ‘기독과 조선민족’(길보른 총리), ‘민족운동의 성서적 근거’(나가타 쥬지 中田重治) 등 제목의 논문을 수록하여 종교적인데 국한 하지 않고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발간하고 있었다. 6·10만세의 관련자가 일본에서 이러한 잡지를 발간하고 있는 것이 일본 관료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천세광 목사는 자주 교회를 전임하게 되었다. 경주교회(1925년), 부산교회(1939년), 삼천포교회(1940년), 광주교회(1942년)로 옮기며 그는 목회를 계속했는데 일제의 감시는 떠나지 않았다. 삼천포에서 목회할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해서 전주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교단이 강제해산 당할 때 고향 군위에서 다시 검속되어 대구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천세봉 목사는 그러다가 1945년 8월 11일 다시 사상범 예비검속에 걸려 군위경찰서에 구금되었고 그곳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왜정말기 8·15해방 전까지 약 3년간 옥중생활로 몸은 3분의 2나 감소되고 이질고열로 시달렸고 옥중에서 모친상을 당하고 가족들은 임지에서 축출당하여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면초가 중에 성결교회는 일본 황도주의(皇道主義)에 배치되었다는 죄목으로 3년간이나 강제 해산을 당하고 삼천리 근역(槿域)에서 성결교회 간판은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이 되었다.

수삼만 신도들은 자택에서 혹은 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본다고 하나 의기소침하여 눈물과 한숨에 잠겨 죄인 아닌 죄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하늘로부터 위로의 음성은 ‘너희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에 참으며 기도를 항상 하라’(롬 12:12)는 성언(聖言)을 확신하고 최후일각인 8·15 당일까지 기도와 찬송을 기쁨으로 부르며 해방예언시(解放豫言詩)와 탈옥문(脫獄文)을 담대히 기록하여 독사와 같은 왜경에게 전하여 너무 악형을 견디지 못할 때에도 호령도 하며 불굴 투쟁한 결과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사형을 면하고 옥문이 열리게 됨에 따라 출옥하여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중생의 복음’, p. 41)

그는 해방 후 고향 군위에서 치안유지회 위원장이 되어 3, 4개월 동안 활동하다가 군정에 인계하고 서울로 올라와 성결교회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45년 11월 성결교회 재흥총회 의장이 되었다. 일제말기 일제의 압력에 민족적 신앙 양심으로 굴하지 않고 투쟁한 천세광 목사가 재건의 주역이 될 만했다.

그는 일제 말기에 없어진 300여개의 교회를 재건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성결교회를 다시 세웠고 그의 헌신과 노력으로 성결교회는 일제 말 교단 해산의 피해를 복구하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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