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 광진 경찰서는 성적 문제로 갈등을 빚어온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무려 8개월간 방 안에 방치한 혐의로 고3 아들 지 모군을 구속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하였다. 아무리 삼강오륜을 기대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패륜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동안 공부를 그런 대로 잘하던, 성적이 상위권인 모범생의 범죄이며, 지난 11월의 수능도 태연히 치렀다는 점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필자는 이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언뜻 구약의 성왕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윗왕이 신앙적인 면에서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러나는 가정은 ‘전형적인 역기능적 가정’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많은 부인과 그로 인한 이복 자녀들, 그 틈속에서 압살롬이란 아들의 범죄가 발아되고 형성되었다. 역기능 가정의 전형적 특징인 ‘경계선 침입’으로 형 암논과 여동생 다말의 근친상간사건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압살롬은 나중에 형을 죽이는 패륜을 범하지만 그 역시 역기능 가정의 희생양으로, 나중에 모략가 아히도벨의 계략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후궁들을 대낮에 강간을 하는 ‘경계선 침입’의 죄를 범하게 된다. 역기능 가정의 역기능성이 대대로 물려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다윗왕이 밧세바를 범한 간음사건이 아들 세대로 와서는 형제간의 ‘근친상간’과 아버지의 후궁, 어머니뻘을 범하는 ‘경계선 침입’사건으로 반복, 전수됨을 보여준다. 즉 어느 가족 구성원의 역기능적 사건이나 행동은 단순히 그 개인의 성향이나 역량을 뛰어 넘어 그 이전 세대부터 내려오는, 다세대 전수과정을 통한 역기능성의 열매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 군 사건을 볼 때, 단순히 한 패륜적 고등학생의 우발적, 순간적 범죄로 치부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지극히 피상적으로, 신문에 보도된 내용만으로 볼 때에도, 지 군의 가정은 역기능적 요소를 많이 가진 ‘역기능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고모의 증언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지 군은 어머니의 억압적이고 엄격한 교육으로 오직 공부만 하도록 강요당했고, 심지어 초등학교때 조차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공부에 대한 과도하고도 집요한 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면서 5년전 아버지가 가출하고 어머니와 별거하며,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부갈등과 가족 불화 과정을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런 중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속박과 공부를 매개로 한 집착은 더 심하여져 결국 한계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함으로 지 군의 범죄를 합리화하거나, 그럴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가정의 역기능성이 다음 세대나 후대에 상상할 수 없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 군 사건을 너무 단순화하여, 패륜적 한 고등학생의 우발적 범죄 정도로 인식하려는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압살롬으로 돌아가 보자. 삼하 15장 이후에 기록된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압살롬이 죽음으로 반란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삼하 18장 이하에 기록된 다윗왕의 태도이다. 구스 사람으로부터 압살롬의 죽음을 확인한 다윗왕은 문 위층으로 뛰어나가 대성 통곡하며 슬피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대단히 놀라운 장면이다.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고자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이지만 다윗은 짐승처럼 슬피 울부짖으며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이라고 통곡한다.

필자는 이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또 잊을 수가 없다. 단순히 압살롬을 향한 인간 다윗의 부정(父情)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필자는 오늘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압살롬같은 지 군의 사건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목회 현장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체감온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 군이 되기 바로 직전’의 많은 성도들을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패륜아 지 군’, ‘실패자 지 군’, ‘문제아 지 군’하고 이름을 붙여 버린다. 이런 세태 속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패륜아 압살롬’ ‘문제아 압살롬’을 잃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슬피 울며 마음 아파하는 다윗왕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마저도 시류를 따라 쉽게 판단하고, 꼬리표를 붙이고,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무리에 속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고, 아파해 줄 수 있는, 그래서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하고 울어 줄 수 있는 성결가족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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