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서울유학

천세광은 1904년 4월 7일 경북 군위군 소보면 보촌 마을에서 비교적 부유했던 천기선(千冀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 밑으로 네 동생이 있었다. 천세광은 조부로부터 ‘만득장손’이라 하여 귀하게 여김을 받으며 성장했다. 조부는 구한국시대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으로 있었으며 한 때 청나라의 원세개(遠世凱)와 함께 활동하다가 낙향한 무반출신이었다.

조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나 부친은 평범한 유교선비였다. 그가 여섯 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동네 서당에 보내 한문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그 무렵 조부가 술객 한 사람을 데려오더니 천세광의 사주를 보이며 장래운명을 점치게 했다. 그 술객은 “단명별세(短命別世)하니 산에 들어가 수도하라”는 점괘를 주고 갔다.

장손의 명이 짧다는 술객의 말에 충격을 받은 조부는 어린 그를 끌고 집에서 2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법주사에 데리고 가 불교인으로 입적시켰다. 그 후로 1년에 4차례 전 가족이 법주사로 가서 그의 장수를 빌었다. 그는 이 같은 가정환경에서 불교 문화에 깊이 젖어들었다. 그 불교행사는 10년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편 여섯 살 때 시작한 한문공부는 열셋이 될 때 까지 계속했다. 이로 인해 천세광은 유교문화에도 젖어들었다. 그 후 군위 읍내 공립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하여 3년 만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한 1920년 3월에 서울에 상경하여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은 3.1운동을 일으킨 중요거점의 하나였다. 보성교장 최린은 천도교 지도자로 3.1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으며 보성학생들은 3.1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학생 20여명이 투옥되는 등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천세광이 보성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이 같은 민족주의학교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의 가슴에도 의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가 보성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기미독립만세운동직후였다. 몇몇 학교에서 만세운동 1주년을 기하여 시위를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사회적 분위기는 민족적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층의 분위기는 더욱 심각했다.

천세광은 속에서 타오르는 애국심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해 열병을 앓게 되었다. 더구나 서울생활이 처음이라 낮선 도시문화의 접촉에서 오는 충격도 병의 요인이 되었다. 그는 신경쇠약증으로 학업에 지장을 받아 영어시험에 낙제하게 되자 보성학교를 포기하고 이듬해 양정 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궐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양정으로 전학한 그는 경성신학원의 바로 옆 신학학원부지로 하숙을 옮겼다. 당시 그는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생각했었다. 양정으로 옮기고 아현동으로 하숙을 정해서 생활의 변화는 이뤄졌지만 그의 정신적 공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민족운동의 좌절로 인한 허탈과 공허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때는 고민에 쌓여 자살까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염세주의자처럼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던 때 기독교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그를 구국의 결단으로 이끌게 된다. 그를 기독교인이 되게 한 집회가 1921년 3월 경성성서학원교사 신축 낙성기념 전도집회 때였다. 5층짜리 경성성서학원교사가 신축되고 낙성 기념 전도 집회가 40일간 계속되었다. 신학생과 교역자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마지막 날에는 악대를 동원한 대중전도 집회를 열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는데 천세광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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