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에 나선 천세광

성결교회에 대포(大砲), 중포(重砲), 소포(경포, 輕砲) 별명이 붙은 세분 목사가 있었다. 대포 천세광 목사, 중포 최창도 목사, 소포 김정호 목사였다. 통틀어 삼포(三砲)로 통했다.

천세광(千世光) 목사(본명 千世鳳 천세봉)는 장수와 같은 거구로서 성스럽고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용모에 카이저수염을 하여 카리스마가 풍기고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그는 천둥이 울리듯 우렁찬 목소로 청중에게 감동과 확신을 준 교단적인 전도자·부흥사·목회자였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민족복음화를 위해 일제의 탄압에 맞서서 6·10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등으로 옥고를 치른 애국애족의 복음신앙가였다. 그리고 전도대장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1926년 4월26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해 6월 10일이 국장일로 결정되자, 조선의 열혈청년들은 과거 3·1독립만세운동과 같은 거사를 펼치기로 결의했다. 심상찮은 움직임을 감지한 일제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이때 순종의 승하를 애도하며 전국에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본경찰은 한 위조지폐 용의자로부터 시위단서를 포착하고 지도부를 일망타진 한 다음 격문과 전단지를 대량 압수했다. 상하이에서 인쇄한 격문 또한 경성역에서 압수당했다. ‘일본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나라 교육은 우리 손에’ 등이 훗날에 밝혀진 격문의 중요내용이었다.

이윽고 6월 10일, 체포되지 않은 학생들이 순종의 운구가 통과하는 곳곳에서 전단을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던 군경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것을 6·10만세운동이라 부른다.

천세광은 경성성서학원 2학년 학생이었다. 기숙사에서 같은 군위출신이며 맹인으로 술꾼이었다가 개종하여 전도자가 된 김영수와 가까이 지냈다.

그는 순종인산날인 6월 10일, 직접 태극기를 만들고 거기에 ‘槿花神國萬歲근화신국만세’라는 글을 써넣었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동지를 포섭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절친한 친구 김영수도 “종교인이 정치에 간여함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참여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천세광은 단독으로 태극기를 숨기고 동대문전차정류소로부터 훈련원으로 통하는 청계천 오간수교 밑에서 순종의 인산행렬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 1시 10분경 삼엄한 군경의 호위를 받으며 인산행렬이 느릿느릿 오간수교를 향해 오고 있었다. 인산행렬을 바라보는 민중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고 일제를 향한 말 없는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드디어 인산행렬이 오간수교 위를 통과하는 순간 천세광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호위하던 경찰이 탄 말들이 놀라 뛰었다. 행렬이 흐트러지면서 소요가 일어났다. 구경꾼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이내 천세광은 체포되었고 군중의 동요는 확대 되지 못했다. 재갈이 물린 천세광은 결박당해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천세광은 이로 인해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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