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계십니까? /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발판이 아래로 떨어지는 덜커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 그는 하나님이 없어진 외로운 곳에서 마지막으로 몸부림을 쳤다.”

작가 정을병 씨는 작고한지 2년이 넘었다. 이 소설(본회퍼의 죽음)은 1976년 제2회 한국소설 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소설인데 발표 된 지 30년도 넘은 글이었지만 나는 그 잔잔하고 리얼한 감동을 잊지 못한다. 물론 정을병 씨는 한국의 글쟁이, 소설가였다. 그런 그가 나치시대 한 독일의 목사 신학자가 사형 당하기까지의 마지막 몇 개월간을 수형일지 쓰듯이 논픽션 기법으로 소설을 펴낸 것은 퍽 놀랍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만큼 관심과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그 한국인 작가는 그가 존경하지만 우리와는 생소한 인물의 마지막 전기를 심혈을 기울여 썼다는 나의 판단이 선다. 착각일까? 나는 그 소설 때문에 본회퍼 목사에게 더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차에 희생된 사람의 장례나 치르고 위로나 하는 것으로 나의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난 그 자동차를 빼앗아 그 미친 사람을 운전대에서 잡아채야 할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목사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한 말이었다. 그는 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조성된 여건에도 한눈팔지 않았으며 그로인해 피해 볼 주위사람들을 더 걱정하였다. 미국에 더 머물며 신상의 안위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신앙인의 양심을 찾아 반 나치운동에 전념하였다.

나는 본회퍼 목사의 전문적인 신학의 면모는 잘 모른다. 그의 신학 정통성에도 이해를 구할 이유가 없다. 단지 평신도로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행하는 믿음’을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도 어렵던 시절 행하는 양심으로 저항하며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힘들고 고달팠지만 잘 극복하고 넘기므로 좋은 시절을 만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사태를 우리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기복신앙과 이기주의에만 몰입하여 성경의 가치를 저속화 시켰다. 타락한 자본주의에 너무 편승하여 버렸다. 계층 간의 갈등에 전할 메시지가 없다.

본회퍼 목사가 목숨을 걸고 반 나치 저항운동에 나선 것은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의 안일과 이기적인 탐욕에만 눈이 멀어 있었고 어용 기독교가 판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생양이 된 본회퍼 목사를 독일인들은 바보라고 했을까?

우리들의 냉소적인 시각도 그 높은 턱을 넘어 설 수 없을지 모른다. 누가 이 시대에 십자가를 지며 희생양을 자초할 수 있을 것인가! 시나브로 때를 기다리며 당신과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하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기득권 보호에 안주하지 말고 개혁하고 변화하는 과감한 헌신과 투자가 있어야한다.

본회퍼 목사의 전집 16권 중 8권의 본회퍼 선집이 출판되었다. 본회퍼학회 회장이신 유석성 서울신대 총장이 주도 하셨다니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학문적으로는 비전문가 이지만 신념과 소명을 걸고 공부하며 노력하는 젊은이들에게 그 책들이 좋은 사표와 덕목이 되기를 바란다.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제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하는 길이며 그 순종의 길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본회퍼 목사의 신학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존경받는 설교이다.

이로써 한국 기독교가 본회퍼 목사의 행동하는 양심을 찾아 갱신하며 어려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 간절해 지는 것이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란 울부짖음이 부끄럽게 들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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