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아스모스의 후예들이여! “avgiasmovs”
지금부터 494년전, 1517년 10월의 마지막날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역사적인 날이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00년 후에 영국에서도 영적 대각성운동의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의 사회변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존 웨슬리(1703~1791)는 중생과 성결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성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사랑을 전파하여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성결교회는 바로 그러한 웨슬리의 신학적 유산을 이어 받아 성결(聖潔, Holiness)을 모토로 하는 자랑스러운 한국교회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한자어인 성결은 순수 우리말로 풀면 ‘거룩함’이다. 구약에서는 거룩함을 히브리어 원어로 ‘코데쉬’(kodesh)라고 하는데, 동사 ‘카다쉬’(kadash,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그 형용사는 ‘카도쉬’(kadosh, 거룩한)이다. 신약에서 거룩함은 헬라어 동사 ‘avgiavzw’(hagiazo, 거룩하게 하다, 신약에서 28번 등장)에서 파생된 명사 ‘avgiasmovs’(하기아스모스)인데, 신약의 서신서들에만 10번 나타나며(롬 6:19, 22; 고전 1:30; 살전 4:3, 4, 7; 살후 2:13; 딤전 2:15; 히 12:14; 벧전 1:2), 그 형용사 거룩한은 ‘avgios'(hagios, 신약에 233번 등장)이다.
오늘날 헬라어 ‘하기아스모스’는 ‘거룩함’, ‘성결’ 또는 ‘성화’(sanctification), ‘성별’로 번역된다. 거룩함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가 되었을 때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존 찰스 라일(John C. Ryle)은 “거룩함이란 습관적으로 하나님과 한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종남 교수는 우리 “성결교회가 주장하는 성결론은 바로 웨슬리의 성화론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avgiasmovs’(하기아스모스)를 번역한 두 용어, 성결과 성화는 같은 말인가? 어원학적으로 성결과 성화는 그 어원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가장 가까운 동의어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지만, 학자들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존 웨슬리는 믿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점진적인 성장 단계 즉 성화의 3단계를 구분하면서, 중생을 성화의 관문인 ‘초기 성화’(initial sactification),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성장과정에 있는 ‘점진적 성화’(gradual sactification),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성결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은 이 온전한 성화의 단계인 것이다. 한영태 교수는 성결을 달리 성화(聖化)로 보면서도, 이에 대해 이렇게 구분하여 설명한다. “성화는 인물이나 사물이 거룩하게 되는 행위 또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성결은 성화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상태로 정의한다. 성화는 내적인 죄로부터의 정결함을 강조하여 경험적인 면을 나타내고, 성결은 성화를 경험한 사람의 상태 혹은 상황에 관계되는 도덕적인 면을 강조한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이라면, 성결은 그 결과로서의 거룩해진 상태”를 말한다. 또한 성결은 최고선(summum bonum)이며, 전능한·구별된·초월된 하나님의 성품과 같은 것이다. 그 최고의 표현은 바로 “사랑”이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덕법을 가치 기준으로 삼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삶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다.
서구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영국 교회가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졌던 것처럼, 21세기 지구촌은 한 치의 앞길을 예측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부패와 도덕적 타락으로 얼룩져 있다. 이 혼탁한 시대에, 거룩한 사람은 겸손, 온유, 자기부인, 인내 등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며,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도달하기 위해 죄를 물리치고 마음과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결은 천사적 성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아 있는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화의 은혜를 체험했더라도 성결은 여전히 성장하는 진행형이다. 그래서 성결인이 된 우리도 온전히 성장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때까지 성결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근대 종교개혁을 일으킨 웨슬리처럼,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성결교회가 성결이라는 이름값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해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분을 도덕적으로 닮는 개인의 성결 혹은 마음의 성결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회적 성결, 삶의 성결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한국교회를 쇄신하고 민족을 변혁하는 성결의 기치를 높이 올리자! 하기아스모스의 후예들, 성결인이여! 그대들만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미래일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