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인 목회활동과 훈훈한 말년

박종만 목사의 목회는 큰 도시 대전에 와서 더욱 크게 빛을 발했다. 그는 초교파적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966년에 대전기독교연합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성결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남대전교회의 대성전 건축과 함께 지역 내에 교회의 다양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교회가 급성장했고, 그의 폭 넓은 지도력을 요청하는 곳이 쇄도하게 되면서 그는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는 1981년 5월, 제36회 교단 총회의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듬해 5월 10일 새 성전 봉헌식을 드린 후, 12일부터 남대전교회에서 제37회 총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고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총회의 장소인 남대전교회는 그의 풍채만큼이나 크고 우람했으며 편리한 교육관과 식당을 활용하여 은혜롭게 총회를 마쳤다.

이 후 그는 교단의 중요 요직인 유지재단 이사, 서울신대 이사, 고시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교단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1985년 2월 대전신학교 교장에 추대되어 교사를 남대전교회의 교육관으로 이전하고, 학생 모집과 장학지원, 그리고 실력 있는 교수진을 확보하여 재임 9년 동안 많은 수의 졸업자를 배출하는 등 성결교회 교역자를 양성하였고 충청지역에 개척교회들을 많이 세워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1992년에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신대 입시 시험지 도난사건이 발생하였고 경찰 수사 도중 학교의 관리책임자가 자살을 하면서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등 혼란한 상황이 계속됐다. 이에 학장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사퇴하였고 긴급 소집된 이사회에서는 박종만 목사를 학장 서리로 추대하여 어려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도록 일을 맡겼다.

이 때 그는 대전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후, 일주일 중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부천 서울신대로 출근했다. 매일 기도회를 통해 교직원들에게 자각심을 일깨우고, 성결인을 양육하는데 힘썼다. 신앙적으로나 윤리적, 사무적으로 한 치의 허술함이 없도록 정신무장을 강화하였고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서울신대는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그는 6개월 만에 직무를 떠남으로 학교를 정상화 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성실하여 해외에 나가기 전에는 국내 어떤 곳에서 회의를 하더라도 주일에는 반드시 남대전교회를 지켰으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기도와 격려하는 일을 아끼지 않아 신자들은 그를 선한 목자라고 서슴없이 불렀다.

1985년 필자가 총회본부 교육국장과 활천 주간을 겸직하고 있을 때 필요에 따라 활천의 창간호(1921년)부터 1968년까지 낱본을 수집한 후, 영인본 27권을 발행했다. 그런데 1961년 예성이 분리되면서 활천을 예성에서 6권 발행한 적이 있어, 예성에서 발행된 활천까지 수집해 이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제27권 부록에 첨가를 했다.

이때 예성에 대해 평소 나쁜 감정을 가진 어떤 목사가 이 사실을 지적하고 정치적 문제로 이슈화하려고 하자 박종만 목사가 그를 만류한 후, 필자를 불렀다. 필자가 대전에 가서 그에게 경위를 설명하자 알았다면서 소신을 가지고 업무수행을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 후 이 문제는 조금도 대두되지 않아 박종만 목사의 그릇이 크고 당당함을 알 수 있었다.

1994년 5월 20일. 그는 만 70세 정년으로 남대전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충청지역 원로목사회를 조직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교단의 발전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다 2008년 6월에 노환 중 김봉태 인도선교사를 불러 인도교회를 설립하라고 부탁한 후, 그해 9월 30일에 86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인도교회는 이듬해 1월에 그를 기념하는 교회로 헌당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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