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작은 섬, 소악도에서 목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이 빠지면 하나의 섬이 되고, 물이 차면 3개의 섬이 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한밤중에 구역예배를 드릴 경우가 많습니다.

물이 빠져 걸어 다닐만 한 땅이 되면 사람들은 땅이 채 마르기도 전에 걸어가는데, 구역예배를 드리기 위해 밤에 그 길로 가야 할 때는 참 난감합니다. 예배 때문에 잘 차려 입은 구두와 옷이 물에 젖어 다 버리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럽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음마 걸음처럼 걷는 저에게 한 집사님이 말합니다.

“전도사님, 반짝이는 것만 밟지 마세요. 반짝거리는 것은 달에 물이 반사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가다가, 오늘 중에 예배드릴 수 있겠어요?”

웃으면서, 핀잔 아닌 농처럼 꾸중합니다.

“반짝이는 것을 밟지 말라”는 집사님의 말은 그대로 진리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들을 유혹하는 수많은 반짝거림이 있습니다. 반짝이는 것을 쫓다가는 깨끗한 우리 몸과 생각이 더럽게 될 수 있습니다. 깨끗함, 성결(聖潔). 이것은 우리의 교단의 이름이기에 앞서 우리 성도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다보면, 자주 난감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구절이 있는데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 이야기 역시 그런 구절입니다.

이해를 어렵게 하는 점은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피의 제사’를 말하기도 합니다. ‘첫 새끼’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농사꾼인 가인은 가나안 사람을, 유목하는 아벨은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들 속에는 뭔가 허전함이 있습니다. 들으면서 반론이 생깁니다. 곡식으로 제사하면, 첫 새끼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이유가 될 어떤 단서도 없고 단지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만을 언급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2~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바칩니다. 혹시 제물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가인이 바친 제물은 ‘땅의 소산'입니다. 본문 앞 창세기 3:18절에 의하면, 땅의 소산물이 무엇입니까? 가시덤불과 엉겅퀴입니다. 가인이 땅의 소산을 바쳤다고 한다면, 바로 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바쳤으니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그리고 18절을 보면,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가시시덤불과 엉겅퀴는 사람이 먹을 수 없으며, 먹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게 번 것들이 가시시덤불과 엉겅퀴입니다. 이런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이 받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우리가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받을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꿩잡는 게 매다”는 소리는 신앙에서는 예배에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배가 중요하지만 흠없는 제물, 깨끗한 제물, 성결한 제물을 올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제물인 우리 자신을 깨끗하고, 흠 없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벌이가 깨끗해야 하고, 더 많이 벌려고 속여서도 안 되고, 부정한 뒷 돈도 안 됩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으면, 식중독에 걸립니다. 영적인 식중독에 걸리지 않도록 성결의 가족들이여 반짝이는 것을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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