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양복 위해 장로 되기로 결심
남영호(南英浩)는 1921년 3월 16일에 경남 사천군 서포면 의구리에서 남덕규 목사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사교성이 있어 교회나 마을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7살에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남보다 뛰어나 월반하여 공부하다가 부친의 부산교회 전임으로 11살 나이인 1932년에 동래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당시 가난한 목사의 생활에 중학교 진급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우수함을 안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 와세다중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배달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하며 공부했다. 중학 5년의 과정을 마치고 1937년(17살) 어린나이에 귀국하자, 부친은 그에게 착실히 신앙생활을 하여 대를 이어 목사가 되라고 말하며 교훈하고 기도했다. 그러나 당시 경성성서학원은 입학연령이 21세 이상이어서 그는 4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부친이 예산의 역리교회로 전임하자, 그는 교회의 노재철, 장갑선 등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부흥에 앞장 섰다. 농촌 청년들은 자기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남영호가 일본 와세다중학 출신임을 알고 그를 따랐다. 그는 청년회의 3대 목표로, 기도와 전도와 봉사를 제시하고 공 예배 후에 청년들이 따로 모여 열심히 기도했고, 교회 청소는 물론 교회의 어려운 일마다 청년들이 앞장서서 봉사했다.
무엇보다 역리교회 청년회의 공헌은 전도였다. 그는 교회의 부흥은 전도에 있다고 역설하여 청년회 안에 노방전도대를 조직했고 주일 오후마다 마을의 집을 찾아가 전도했고, 삽교의 장날마다 노방전도를 했으며, 교회가 없는 마을을 찾아가 집집마다 전도했다. 그리하여 역리교회는 주일마다 새신자들이 자꾸만 늘어나 부흥되어 갔다.
1940년에 역리교회는 이영갑 장로 등 3사람을 장로로 장립했다. 이영갑 장로는 남 목사에게, 아들 남영호가 전도와 봉사를 잘하여 훌륭한 목사가 될 자질이 있으니 교회에서 학비를 전담하여 신학교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남덕규 목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성도들 가정의 자녀들도 생활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데, 목사의 아들이라고 교회의 헌금으로 특혜를 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남영호는 부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평생 낡은 양복 한 벌과 때가 절은 흰 와이셔츠 하나, 그리고 낡은 구두 한 켤레로 사는 부친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롭고 아팠다. 그래서 목사를 포기하고 돈을 버는 장로가 되어 부친에게 양복과 와이셔츠와 구두를 사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부친이 1942년에 청주서문교회로 전임했다. 남영호는 직장에 취직한 후, 교회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일했다. 1943년 5월, 성결교회 교역자들이 사중복음 중 재림신앙의 강조 때문에 일본 국시에 어긋난다는 구실로 일제히 체포되었고 남덕규 목사도 청주경찰서에 수감되어 매일 심문을 받고 구타를 당했다.
남영호는 공의를 찾아가 노구의 부친을 병보석으로 해달라며 날마다 졸랐고 이에 감동한 공의가 정기 진찰일에 유치장에 들어가 남 목사에게, “영감님, 본래 가슴앓이가 있어서 위험해요”라고 병보석을 건의했다. 하지만 남 목사가 이를 거절함으로 병보석이 수포로 돌아갔다.
나중에 출옥 후, 영호가 시킨 것을 안 남 목사는 야단치면서, “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부친 같은 목사가 될 수 없으니 장로가 되어 목사를 잘 보필하겠다고 다시금 결심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