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목회와 6.25 피란생활, 그리고 승리의 목회

1949년 박종만이 신학교 2학년 때 송인구 전도사가 전임하면서 청주 송정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첫 목회지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1년 만에 20명 신자가 60명이 되었다. 그는 곧 청원군 용정장로교회의 청빙을 받고 전임하게 된다. 그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서울에서 공부하고 토요일에 내려와 심방하고 주일에 설교했다. 1950년 4월이었다.

그해 6월 25일.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나자 청주에 갔다 온 사람들이 38선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골은 라디오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그는 동네 부잣집에 가서 라디오를 들었다. 새벽에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탱크로 밀고 내려오고 있다면서 국방경비대가 용감히 저지하고 있다고 방송하자 그는 며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 당했다는 보도에 그는 당황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우리나라를 지켜주소서”하고 외치며 기도했다. 며칠 지나자 북쪽에서 피란민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아내와 아들을 2km 떨어진 누님댁으로 피신시킨 후, 담요와 옷 한 벌, 분유 한통을 둘러매고 피란민들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며칠씩 굶주림 속에서 냇물을 마시며 피란을 계속했다. 대전 근처에서 다행히 충북도청 직원들의 트럭을 만나 얻어 타고 전주까지 갔으나 계속 밀려오는 공산군 때문에 하루 만에 전주를 떠나 화물차에 몸을 싣고 종착인 순천까지 갔다. 그 후 그는 계속 쫓기는 몸처럼 여수로, 삼천포로, 고성으로, 마산으로, 그리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에서 한숨을 돌린 그는 하루에 한 끼 먹을 때면 다행이고, 거의 굶다시피 피란가기에 바쁜 세월이었지만, 일본군 때 받은 고된 훈련에 비하면 별로 힘든 줄 몰랐다.

그는 다행히 부산에서 위생병 대위가 된 일본군 동료를 만나 국군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위로하고 전도하는 일을 했다. 9.28 서울 수복 소식을 들은 그는 선무공작원에 선발되어 정세에 대한 강연을 들은 후, 군복을 입고 군 트럭을 타고 북진했다. 그는 누님댁에 들려 가족을 데리고 용정교회에 가서 두달간 목회하다가 이듬해 1.4후퇴 때 다시 영동군에까지 내려갔다.

1951년 전쟁 중에 서울신학교가 부산에 피난신학교를 개강했다. 금정산 기슭에 천막을 친 피난신학교는 재학생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피란생활에서도 기도와 찬송, 그리고 아멘의 연속이었다. 전쟁 중이라 학기도 단축되어 그는 1952년 3월에 졸업을 했다. 그는 이듬해 충북노회의 목사고시에 응시해서 합격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본래 장로교 신자여서 성결교회에 대한 애착이 그땐 별로 없었다.

그 때 그에게 부여은산성결교회 송인구 목사가 몇 번 찾아와 성결교회가 좋다며 성결교회로 돌아올 것을 권면했다. 그러던 차 부여규암성결교회의 목사가 공석이 되자 치리목사인 송인구 목사의 강권에 따라 그는 규암교회에 부임하면서 성결교회로 돌아왔다. 송인구 목사는 그에게 중요한 때마다 나타나 권면하여 길잡이가 되어준 고마운 친구였다. 1913년에 개척된 규암교회지만 그의 열심있는 활동으로 현대식 새 건물을 짓고 250명으로 부흥하였다.

그 후 그는 1956년에 남대전교회 제3대 목사로 청빙을 받고 도시목회의 비전을 품고 부임했다. 몇 년 후, 그는 대전의 신시가지 문창동에 780평을 사서 교회를 이전했다. 1977년 33일간 주미산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고 돌아와 대성전 건축을 발표하고 착공하여, 주님의 기적 속에서 오늘의 3층 건물 연건평 1105평의 대성전을 우뚝 세웠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