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과 헌신생활의 배경

조국은 광복되었지만 상해에 있던 일본군은 해산되지 않았고 당분간 치안유지에 힘쓰라는 승전국 미국의 지시를 받았다. 그와 조선인 군인들은 분통이 터졌고 마침내 부대를 탈출하기로 모의한 후, 24명이 한 밤 중에 병영을 탈출했다. 하지만 그들 중 12명은 붙잡혔고 그를 포함한 12명은 무사히 탈출하여 전에 알고 있던 정옥녀 할머니 집에 피신했다. 정 할머니는 유명한 안중근 의사의 제수씨로 애국자여서 그들을 며칠 동안 숨겨주었다.

마침내 1945년 10월 15일 미군에 의해 일본군이 무장해제가 되면서 그들은 자유롭게 상해거리를 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다. 중국 각지에서 상해로 몰려든 일본군에 징집되었던 조선인들은 육군, 해군을 합쳐 수천 명이 되었다. 중경에 주둔하고 있던 광복군 본부에서는 이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그들은 일본군 옷을 벗고, 상해 교민들의 도움으로 광복군복을 맞춰 입었으며, 식량은 일본부대의 창고를 털어 끼니를 해결했다.

광복군들이 조국의 명예로운 입성을 바라며 상해 서강대학에서 훈련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이 와서 사열을 한 후, 이제 조국으로 가서 새 국가 건설에 역군이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말로만 듣던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을 직접 보니 그는 가슴이 뛰었고 애족심과 애국심이 다시금 솟구쳤다. 그러나 미군정청의 지시로 광복군은 상해에서 해산되었다. 그는 이듬해 3월, 남궁혁 박사가 인솔하는 제3차 귀국함에 승선하여 부산항에 도착한 후 각자 뿔뿔이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고향마을로 갔고 마을에서는 3년 6개월만의 귀환이어서 온 마을이 환영하는 잔치를 했다.

그는 얼마 후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싶어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독립촉성국민회의 충북지부를 찾아가 가입하고 정치적 활동을 했다. 충북도청에 근무하던 박종렬 사촌 형이 찾아왔다.

“동생,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정치에 손대면 안 돼. 이제 가장이 아닌가? 도청에 와서 일하게.” “누가 나를 도청에 써주겠어요?” “나는 그동안 고등성경학교를 마치고 청주교회 전도사로 가게 되었네. 내 자리에 자네를 추천했으니, 당분간 와서 일하게.” “좋아요. 그런데 당분간이 무슨 말이요?” “아, 자네는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 아닌가?” “제가요?” “다들 죽는 군대에서 동생이 살아온 건, 하나님이 쓰시려고 살려주신 거야. 잊지 말게나.”

며칠 후, 그는 미군정청 산하 충북도청의 보건후생국 보건과 서기로 발령 받아 공무원이 되어 2년 이상 근무했다. 그는 공무원 생활이 편하고 좋았다.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다보니 주초(酒草)를 마음대로 했다. 교회는 생각나면 가고 안 갈 때도 있어 교회와 멀어졌다.

어느 토요일에 송인구 씨가 그를 찾아왔다. 송인구 씨는 전에 고등성경학교를 같이 다니다 서울신학교에 편입했는데, 신학교가 일제 말에 폐교되는 바람에 쉬고 있다가 해방되어 다시 복학한 신학생이었다. “박 선생. 이제 세상 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서 나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합시다.” 송인구 씨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토요일마다 나타나 공부를 권면했지만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첫아들 은순이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 충격을 받은 그는 실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 때 형 박종렬 전도사가 찾아와 그를 설득하여 청주제일교회 부흥회에 데리고 갔다. 이 집회에서 불꽃 가운데 부르시는 모세에 대한  설교에 강한 소명을 받고, 순종하지 않은 죄 값으로 아들이 죽었다며 통회자복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1948년 3월이었다. 그는 9월에 있는 서울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직장에 사표를 내고 헌신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