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는 크지만 양처럼 순한 순둥이

박종만(朴鍾萬)은 1924년 9월 4일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라는 두메산골에서 박영규 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산이 깊어 옛날에 대숲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호죽리(虎竹里)라 불렸는데 일명 ‘범때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조상 대대로 체격이 큰 박 씨 가문 태생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남보다 크고 건강했지만 마음은 엄마를 닮아 순한 순둥이로 자랐다.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20여 호가 오순도순 사는 산골마을에서 그는 어려서는 마을 아이들과 산을 오르내리면서 놀았고, 가정의 작은 농사일 심부름을 하면서 자랐다. 한학을 공부하는 형에게 6살 때부터 가끔 천자문을 배우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1934년 그의 나이 10살 때 5km나 떨어진 먼 마을에 간이 소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큰 형을 따라 신식학교에 입학하여 매일 먼 산길을 오가며 공부했다. 늦은 나이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는 반 친구들보다 3살이나 많고, 또 키가 월등히 커서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진급할 때 교장의 배려로 4학년으로 월반하여 공부하다 5학년에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당시 청주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한다고 해도 객지에서 하숙생활비와 교육비 등이 많이 소요되어 가난한 그의 가정 형편에는 엄두도 못 낼 지경이어서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아이들 대부분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때가 되면 장가들어 자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소학교 때 그를 가르쳤던 한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선생이 되는 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했다.

1938년 나이 15살 때 그의 인생에 변화를 주는 사건이 나타났다. 그의 마을에서 6km나 떨어진 덕촌리에 장로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 마을 사람이 청주에 갔다가 미국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아 신자가 된 후, 복음을 전하려고 선교사 후원으로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오랫동안 ‘공자 왈 맹자 왈’을 찾던 마을 청년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신기해서 찾아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졌다. 오후에 드리는 주일학교에는 마을 어린이들이 몰려와 빈자리가 없이 가득 찼다. 조용하던 마을이 주일마다 찬송가 소리로 들썩였다.

범때마을의 한 사람이 친구를 찾아 덕촌리에 갔다가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고 와서 덕촌리교회 소문을 퍼뜨렸다. 답답한 산골의 청년들이 새로운 것을 찾아 주일에 덕촌리에 몰려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 청년들이 전도해서 마을 청년들과 아이들도 주일마다 아침을 먹고 덕촌리교회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덕촌리교회에서 호죽리에 지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집사들이 와서 토담집을 하나 사서 수리한 후, 호죽교회라고 간판을 달았다. 교회 청년들이 아이들이 만나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해서 종만이도 호기심으로 교회에 나갔다. 덕촌리교회 집사가 와서 찬송가도 가르치고 설교도 했는데, 이 세상 뿐 아니라 더 좋은 하늘나라가 있다는 말에 놀랐다.

그는 매사에 성실해서 한번 시작한 교회에 한 주일도 결석 없이 계속 나갔다. 그랬더니 성탄절에 그에게 개근상으로 성경책 한권을 주었다. 그는 틈만 나면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유교에 빠진 형이 교회를 반대해서 그가 교회에서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와 성경을 뺏어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에게 닥친 최초의 시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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