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3년에 제1차 휴머니스트 선언이 발표되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1973년 8월에는 시드니 후크,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227명의 세계 모랄리스트들이 서명한 제2차 휴머니스트 선언이 발표되었었다. ‘휴머니스트 선언’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서명에 참여한 세계적 지성 중의 많은 사람이 무신론자들이어서 종교(특히 기독교)를 향한 선언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따끔했었다.

▨… “우리는 종교를 선의에서 믿고자 할 때 그것은 가장 높은 단계의 윤리관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에 헌신할 수도 있게 한다고 믿는다. 도덕적 헌신이나 창조적인 상상은 참된 영적 체험과 욕구를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필요나 체험보다도 경전(經典), 신의식(神儀拭), 도그마를 존중하는 교조적 권위주의적 종교들이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제2차 휴머니스트 선언)

▨… 종교가 교조적 권위주의적 모습으로 기울 때 빚어지는 병폐의 양상은 굳이 휴머니스트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미 넉넉하게 밝혀져 있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밝히기 위하여 자신이 안식일에도 주인이심을 선언하셨다.(막2:28)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그 의미는 도그마가 아니라 그 삶이라는 것을 교회는 2천년 동안 붙들어 왔었다.

▨… 못 먹고 못 입어 한이 맺혔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경제발전이 우선이라고 목을 매달았었다. 한때 이 나라를 휩쓸었던 ‘경제발전’의 광풍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 구호 때문에 침해당하고 묻어둬야 했던 가치들 곧 인권, 자유, 평등의 상실로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신음을 토해야 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 전국의 성결교회를 옥죄이고 있는 ‘교회 성장’이라는 구호에 대해 누가 감히 딴죽을 걸 수 있으랴. 교회 성장은 모든 목회자들의 소원이고 꿈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쯤에서 다시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이 광풍의 열기 때문에 십자가를, 예수님의 삶을 잠시라도 잃어버린다면… 그런 우리의 모습이 누군가를 아니, 주님을 절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한번쯤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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