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 예배당 건축과 교단적 관심

1954년에도 제주읍성결교회의 소식이 ‘활천’에 실렸다. 당시 제주읍성결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제주읍교회 소식/본 교회는 피난민 복귀 후에도 여전히 부흥 중 장년 80여명 유년 3, 40명이 회집하여 지난 12월 27일에는 조주찬(趙宙贊) 목사의 주례 하에 세례자 6일 학습인 24인이었으며 특별한 사실은 김복순 집사는 득남기념으로 만 이천 환을 바쳐 성종을 기증하였고 유지 이종열 선생도 득남기념으로 6천환을 드려 강대상을 헌납했으며 유옥란 집사와 김순애 자매는 3천환을 바쳐 유년주교 우승기를 제공하여 주께 영광을 돌린다더라”(활천 1954년 2월호 42쪽).

1954년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열린 교단 제9회 총회에서는 한 해 동안 제주선교를 위해 지출한 제주도전도비 총액이 3만5000환이었다. 이 금액은 당시로서, 또 성결교단 차원에서 볼 때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당시 청년회 보조비가 7만6000환이었음을 감안 할 때 제주전도비는 그 50%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제주읍교회는 총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학교헌금에도 참여하여 1956년에 신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신학교주일헌금 1,610환을 헌금하기도 했다.

제주읍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교회당을 건축할 필요가 생겼다. 1956년 제11회 교단총회에서는 제주도의 특수사정을 감안하여 특별전도에 주력하고 교역자를 인선하여 파송하고 건축비보조를 해주기로 결의했다. 성결교회 총회는 동경교회를 처분하여 확보한 2,089,420환 중에서 1,600,000환을 제주읍교회에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동경교회를 매각하고 그 금액 중 거의 80%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원한 것이다(제11회 총회록 34쪽).

제3대 담임으로 신현호 목사가 1956년 6월에 부임했다. 신 목사는 총회로부터 제주교회건축비로 200만환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통보를 받았다. 제주교회건축은 기존건물을 단계적으로 시공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1단계로 종각과 전면과 측면 공사만을 착공하고 후면 개축은 2단계로서 인접가옥과 그 대지를 구입한 후에 증축을 하기로 하였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던 제주교회에서는 건입동 999번지에 있는 임시건물을 10만환에 매매하여 성전건축기금으로 책정하고 교회건축 진행을 위해 건축비를 6명의 교회직원들이 376,000환을 대부해줬다. 총회본부로부터 구호물자대금 7,500환, 천막대금 3,000환 계10,500환을 수령하였다. 교회는 건입동 1203번지에 있는 대지 57평 건평 40평의 탁구장을 하던 건물을 매입하고 석조 건물 예배당을 완공하고 1957년 6월 30일 주일 새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1956년 12월16일 직원회에서 제주읍교회를 제주제일교회로 개명하여 새로운 도약을 꿈꾸었다.

제주교회 개척기에는 구호사업이 피난민과 원주민의 극빈자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고 또한 교회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6년 12월에 제주제일교회로 구호미 15포와 우유(분유) 85상자가 들어와 적절하게 분배해줬다. 1957년 7월에도 밀가루 16포, 분말우유 42통, 의복 7부대를 수령했다. 전 교인이 구호대상자이기 때문에 전원에게 지급했다. 그해 9월 13일에도 밀가루 22포, 분유 22상자 피복 0.7포가 들어왔다. 구호본부의 지시에 따라 3할은 비신자에게 분배하고 7할은 교회 신도에게 분배했다.

한편 제주제일교회 개척에 힘썼던 강진국 장로는 이성봉 목사의 권유로 제주교회를 사임하고 신촌교회로 부임하였으며 1957년 5월 27일에 성결교단 희년총회 때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촌교회 천정에 못질을 하다가 망치로 발목 힘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으며 부산보신교회로 전임했다가 1958년 4월에 제주제일교회로 재차 부임했다. 하지만 춘계심방을 마치고 매우 지친 몸으로 1960년 5월에 54세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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