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담임목사 오태상

제주성결교회의 제1대 담임목사로 오태상 목사가 부임한 것은 1951년 9월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성결교회 피난민 성도 몇 가정이 건입동 소재 999번지 행정당국에서 피난민에게 지원하는 천막을 배정 받아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장로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천막을 치고 그 중간 사이에 나무판자로 간이 바닥건물 예배당을 세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때 오태상 목사는 침술 등 의료사업을 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당시 피난민들과 원주민들의 위생환경이 열악하여 장질부사 등 전염병이 돌았다. 오 목사는 환자들이 있으면 달려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진맥을 하여 약을 조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침으로 시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주었다.

오 목사는 교회가 교역자 월급을 지급할 형편이 못 되어 무보수로 자비량 목회를 하였다. 오 목사의 목회경력을 살펴보면 제주교회에서 뿐 아니라 거의 무보수 자비량 목회로 일관하다시피 했다. 오태상 목사는 일본에서 목회를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복음사역에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당시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그를 청빙하는 교회가 없었다. 그는 약국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비량으로 복음사역에 헌신했다.

그는 1948년 개척기여서 교역자를 모실 형편이 안된 인천 도원성결교회의 제1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교회에게 생활에 대한 일체의 부담을 주지 않고 자신은 의료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오히려 성도 중 가난한 환자에게 인술을 베풀어가며 3년 동안 무보수로 사역하였다. 1951년 전쟁을 피하여 제주도에 와서 제주교회의 제1대 목사로 부임한 그는 자비량 무보수로 목회사역을 했고 1953년 10월에 이임하고 서울로 환도했다. 그는 환도한 후에도 서울한성교회를 개척하고 동사 목회를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했다.

오태상 목사가 서울수복을 계기로 상경하면서 제주도의 유일한 성결교회인 제주교회는 목회자가 공석이 되었고 부흥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총회는 강진국 장로를 제주교회에 파송했다. 강진국 장로는 목회의 소명을 받은 후 1953년 부산에 피난 중인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월요일에는 배편으로 부산에 가서 목요일까지 수업을 받고 금요일엔 제주도로 돌아와 목회하는 힘든 여정을 계속했다. 강 장로가 열심히 전도하여 본토인과 피난민으로 구성된 교인이 100여명이 넘었다. 이렇게 교회가 부흥일로에 접어들면서 10여명이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1951년에 시작된 제주성결교회는 1953년 12월에 이르러 8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1953년 12월 발행 ‘활천’에 강진국 장로는 “제주읍성결교회소식”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제주성결교회를 소개했다.   

“제주도 제주읍교회 소식/1951년 1·4후퇴 시 성결교회 피난신도들이 모여 천막을 치고 예배를 시작하야 지금에 이르렀는데 오태상 목사, 강진국 장로, 이승춘 전도사 등 제씨가 원주민동포를 위하여 열심히 전도한 결과 피난민 복귀한 후에도 원주민 40여명과 기타 공장에 근무가족 40여인이 합 80여명이 모임으로 제주도에도 우리 성결교회가 설립 되었다(강진국).”

80명이라는 숫자는 적은 것이 아니다. 개척한지 불과 2~3년 만에 그것도 피난민들이 귀환한 상황에서 8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놀라운 성장을 보여 준다. 어린이들이 130명이었음을 고려할 때 제주교회는 210명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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