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결교회 창립 추진

제주제일성결교회 창립 60주년 및 성결교회 제주선교 60주년 기념 감사예배가 지난 5월 15일 제주제일교회에서 제주제일교회와 제주직할지방회의 소속 교회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성대히 진행되었다. 그날의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만큼 성결교회 제주선교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908년이다. 한국장로교회에서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가운데 한 명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것이 제주선교의 시작이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성내교회개척을 위시하여 제주 전 지역에 12개의 교회를 세우는 제주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선교사역을 기념하여 조천 와흘리에 이기풍 선교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성결교단이 제주성결교회의 창립을 추진한 것은 제주제일교회가 창립되기 5년 전인 1947년 10월에 개회된 제2회 총회에서였다. 10월 7일 오후 2시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인 경성신학교 대강당에서 속개된 회의에서 전도부장 천세광 목사가 전도부 결의안을 통상회의에 보고한 내용 가운데 제주도 신개척에 대한 결의안 보고가 나왔다. 
“호남지구가 건의한 제주도 신개척은 총회가 보조함이 가한 줄 아오며”

이 결의 안건은 통상회에서 받아들여져 전도부의 결의안으로 구체화되어 상정되었다.

“아 단체(我 團體)의 40년간 숙원사업이든 제주도의 신개척을 위하야 목포교회에서 수만 여의 헌금을 하야 이를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이렇게 성결교회는 제주교회 개척을 착수하기로 하고 그 소임을 호남교구에 일임하고 총회에서 보조하기로 결의했다.

제주교회개척은 이 땅에 성결복음의 전래되기 시작하면서 성결교단이 갈망하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성결교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제주성결교회의 설립이 40년간을 갈망하던 사업이었다. 당시 제주교회의 창립을 가장 갈망할 것은 목포교회였다. 목포교회는 당시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였고 목포교회의 담임 교역자는 총회 전도부장 천세광 목사였다.

그러나 개척의 여건과 준비가 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았고 천세광 목사는 이듬해에 천안교회로 전임되었다. 천 목사는 목포교회에서 어린 딸을 먼저 하나님나라로 보내고 천안교회로 전임했다고 한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닌듯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민족최대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우리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많은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도 대단했고 일제의 탄압과 전쟁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초토화된 우리 민족의 재건은 다시 한 번 한국전쟁의 참화로 어려움에 처했다. 피난의 물결이 이어졌고 1·4후퇴 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밀려왔다.

이런 가운데 제일 안전한 제주로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이러한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큰 비극이었지만 제주에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였다. 전쟁 후에 엄청난 기독교 교인들이 유입되면서 제주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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