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요구하는 조용한 지도력

정진경 목사는 성결교회의 역대 목사 중 대외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폭넓게 활동한 사람이다. 그의 초교파적 직책을 보면, 한국교회의 주요기관장을 모두 맡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는 직책을 맡으려고 누구에게 부탁을 하거나 음식을 대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성격상 큰 직책을 맡지 않으려고 사양하여 기관의 총회에 별로 참석을 하지 않았지만, 기관의 총회에서 결의하고 또 맡아달라고 찾아와 사정을 함으로 어쩔 수 없이 맡은 것뿐이다. 이는 많은 교회기관들이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지도력을 크게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무리 없이 원만하고 화해롭게 기관을 이끌었으며, 또 직책을 맡은 이상 그는 기관의 발전을 위해 적절한 시간과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또한 회비는 물론 필요한 재정을 위해 그를 지지하는 후원자들을 참여시켜 기관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기여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실무자들을 격려하고 칭찬을 해서 사기를 북돋우는 특기가 있었다.

그는 위에 열거한 주요 기관의 고위직책 중에서 장로교회의 목사가 아닌 성결교회 목사로서는 맡을 수 없는 한계적 직책이 몇 가지가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선교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추양한경직선교재단 이사장 등이다.

알다시피 한국교회선교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주동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이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상륙한 장로교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라 선교사의 입국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0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들이 주동해서 조직했고, 다른 교단의 지도자들은 들러리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회장은 한경직 목사였고, 100주년 기념사업은 성대하게 진행했으며, 몇 가지 기념사업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용인의 100주년 한국교회 순교자기념관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기념묘지와 100주년기념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100주년기념사업회도 그동안 장로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들이 맡아왔으나 최근에는 장로교회가 독주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몇 년 전 성결교회 정진경 목사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으니 괄목할만한 사건이 아닌가.

또 추양한경직선교재단 이사장도 마찬가지다. 설악산 온천 수련회관인 추양하우스가 있고, 추양장학회 등 몇 가지 사업이 진행되는 추양선교재단은 장로교(통합측) 지도자들이 이사 일색으로 구성됐고, 추양하우스도 영락교회가 한경직 목사 기념 수양관으로 건립한 것이다. 바로 이런 곳에 정진경 목사가 10여년 전에 재단이사장이 된 것도 놀라운 일이다. 한경직 목사 이후, 한국교회의 각종 주요기관의 지도자로 부각된 정 목사는 교계의 원로목사였다.

여기 비화 하나를 소개한다. 1989년 한경직 목사의 발기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창립될 때 초대 대표회장으로 추대된 한 목사님이 극구 사양하여 같은 통합 교단 박맹술 전 총회장이 선임됐다. 2년 후, 합동교단의 대표가 대표회장이 되는 순서인데, 전형위에서 성결교 정진경 목사를 선임했다.

당시 한기총 총무가 합동교단의 목사였기에 편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합동측에서 반발했고 압력을 받은 총무는 몇 달 후 사임했다. 합동측이 한기총을 탈퇴한다는 말도 들리자, 정 목사는 취임 6개월 만에 대표회장을 자진사임하고, 합동측 인사를 대표회장으로 밀어 위기를 막는 등 한기총의 기초를 다진 화해의 종이었다.

그가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자, 2009년 9월 7일,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기독교연합회장(葬)’이 진행되었고 당시 총회장 원팔연 목사는 설교에서 “초교파적 원로목사님”으로 그를 호칭했다. 초교파 성도 1천여명의 애도 속에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고, 시신은 화장 후, 크리스챤 메모리얼파크에 안장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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