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언제나 교회가 가진 모든 시대의 현재와의 살아있는 대화였다. 즉 신학의 주체는 언제나 교회였다. 신학은 교회의 위임을 받아 교회의 신앙의 전통과 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맞추어 교회가 지닌 메시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참되고 진정한 신학은 교회와 사회라는 두 상황을 배려하지 않은 적이 없다.
현대에 들어서는 교회와 사회일반의 관계에다 대학의 학문성을 추가하기도 한다. 아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신학 본연의 작업이라는 신학의 진리성을 강조한 예일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소 우려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 속에는 교회의 메시지가 진리와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가장 성공적인 신학은 이러한 대화를 가장 진지하게 이끌어간 것에서 태어난다.
항상 같은 메시지를 갖고 있는 교회가 왜 이렇게 매번 다른 시대 상황들 속에서 새롭게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하는가? 이 변화의 과정을 살피다 보면 적어도 세속화시대와 비 세속화시대로 구분 짓는 두 개 이상의 색다른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세속화가 일어나기 이전 시대, 그러니까 18세기 이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학의 변화는 누적된 신학의 전통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서로 상응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들 대부분 교회의 내적 요구로부터 변화를 요청받았다는 것이다. 신학 변화의 배후에는 바로 교회의 영성생활과 예배 그리고 설교를 위한 요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가톨릭교회의 회개전례로부터 자라난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는 교회의 내적인 변화 욕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세속주의적 세계관이 주도적인 세계관이 된 이후의 신학의 변화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보수주의와 복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가 뒤엉켜 서로간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는 양상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보수주의건 복음주의건, 혹은 자유주의건 간에 세속주의 문화에서 종교는 개인적인 사건으로 치부되어 교회의 주장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진리라는 공적 담론의 성격이 급격하게 약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오늘 날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거의 확실한 것처럼 경고되는 지구환경의 대 파멸을 자연스럽게 주님의 재림과 연관시킬 수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이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그리고 이 현실이 교회에게 ‘교회가 가진 복음이 과연 진리일 수 있는가’라는 비판적 질문을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즉, 진리라면 어떤 면에서 여전히 진리인가를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교회의 신학이 변화하는 양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 복음의 자기검증 시스템과 연관이 있다. 즉 요청되는 신학적 변화의 기본 양상으로 두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다. 사회인들이 요구하는 일반적 진리관을 그대로 수용하여 종교적 내용을 거기에 맞추어 재해석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영성생활을 더 심오하게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가진 사실성과 진리성을 현실비판의 언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전자의 해답은 신학을 외부 환경의 변화에 종속시켜 교회의 영성생활의 의미를 고려하지 못한 것일 수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교회의 현실과 사회의 현실을 이어주는 가장 근본적인 공통의 장을 확보하여 그것에서부터 새롭게 신학적 현실과 세속적인 현실의 연관성을 되찾아 가야할 쉽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 대화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더 기본적인 하나의 조건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라는 기본적인 재인식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이 땅위에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알고 이를 경배하는 종교이다. 이 기본적인 인식이 바로 삼위일체론이고 양성론이었다. 흔히 사람들이 현대를 영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바로 이 교리들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서의 유산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