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교회 사역,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한 목회

정진경 목사는 장충단교회를 2년 만에 사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래서 정교수가 되고 각 학과장과 대학원장의 보직을 수행했다. 담당 과목은 조직신학이었는데 미국식 자율학습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인기가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진보적 교수로 알려졌지만 신학은 보수였고 생활이 진보적이었다.

1975년 신학교수로 15년을 사역하면서 후학양성에 보람을 느꼈으나 목회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한 후배들이 속속 귀국하여 교수로 참여하면서 그는 후배들에게 교수직을 양보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서울 신촌교회에서 청빙이 왔고 목회와 신학, 역사현장 이 3가지 연결을 평소 주장한 그는 그 실천을 하기 위해 승낙했다. 그가 부임할 때 신촌교회 신자들의 신앙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는 설교와 교육을 통해 신앙은 보수, 생활은 진보라는 방향으로 정립하게 했다. 그리고 개인이 받은 은혜를 사회에 환원시켜 사회의 변화에 적극 개입하도록 강조했다. 그의 수준 있는 긍정적 설교로 몇 년 만에 교회는 사회의 상류층인 교수, 법조인, 기업가들이 몰려와 크게 부흥됐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그는 설교를 더욱 연구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의 설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의 유명한 ‘설교론’이 탄생했다. 그것은 설교의 3대 명제로, 말씀(케리그마)과 상황, 전달(커뮤니케이션)을 말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보자이듯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하는 중보적 역할이며 따라서 설교는 성서라는 재료로 어떤 사람에게도 구미를 당기게 하는 신령한 영적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981년 신촌교회 재임 중 교단의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총회장이 된 그는 교단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초교파 연합 사업에 적극 참여토록 추진하여 교단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나갔다. 그동안 서로 눈치를 보느라 유보하던 기독교방송, 찬송가협회, 성서공회 등 초교파 복음주의 사업에 교단 인사가 이사로 적극 참여하여 주역으로 활동하게 했다.

1985년 신촌교회는 30주년을 맞아 당시 8억원이나 소요되는 헌금을 투입하여 교육관을 건축했다. 연세대, 이화대, 서강대, 홍익대, 명지대 등 굴지의 종합대학의 중심에 서 있는 신촌교회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이 시대의 막중한 책무를 가졌기에 반드시 그들을 가르칠 교육공간이 절실했다. 건축도 하나님의 은혜로 잘 마쳐 교육을 통해 교단의 굴지의 교회로 성장했다.

1991년 그는 70세의 정년에 따라 18년 간 시무한 신촌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쉴 수 없었다. 그가 원로목사가 되자, 초교파적 기관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원해서 그는 초교파적 지도자로 활동하며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기독교지도자로 더욱 바쁘게 활동했다. 그가 초교파적 지도자로 활동한 주요직책만을 살펴도 이는 확인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서회 이사장, 한국월드비전 이사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한국기독교학술원 이사장, 한국교회선교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 월드컨선선교회 회장, 한국교회지도자협의회 공동회장, 기독교21세기운동본부 대표회장, 추양한경직선교재단 이사장 등 무려 16개 기관의 최고지도자를 은혜롭게 역임하여 발전을 다졌다.

또한 그는 기독교교육에 관심이 많아 서울신학대학교 이사장, 호서대학교 이사장,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사, 한동대학교 이사 등 학교교육의 발전에도 관여했다. 그의 꿈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인재양성을 통해 한국복음화와 세계선교로 인류구원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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