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민족독립투쟁이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소련 등지에서 줄기차게 이어졌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즉시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혈전한다,”

▨… 미일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일제의 한국교회 탄압도 그 도를 더해갔다. 1940년 말경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태반은 강제 퇴거되었다. 1942년 6월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 원한경이 부산항을 떠나면서 선교사들의 철수는 마감되었다. 일제 강압에 꿋꿋이 버티던 한국 성결교회의 교역자들은 1943년 5월 24일 일제 검거라는 비운을 겪었으며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교회가 강제 폐쇄되는 아픔을 당해야 했었다.

▨… 로마제국의 탄압으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할 수밖에 없엇던 교회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언제나 정교분리론을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졌었다. 중세 봉건영주들의 횡포와 나치, 팟쇼, 볼세비키들의 전체주의의 탄압을 모면하려는 부르짖음은 정교분리라는 현실적인 방안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했다. 정교분리는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는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 나치 치하에서 어느 독일 청년이 유명한 신학자에게 물었다. “제 조국은 제게 입영을 명령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학자가 대답했다. “결단은 스스로 해야 한다. 그 책임도 자신만이 질 수 있다.” 그 신학자에 의하면 “기독교에는 국적이 없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국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이다.

▨… 헤겔이었던가. “개인은 국가에 의해서만 자유를 향유하고 국가에 있어서만 자유롭다”라고 말한 이는… 자칫하면 국가를 절대주의적인 정치 이념으로 오해하게 만들 소지는 있지만, 일제 36년의 체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절실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8.15광복절을 맞아도 국가의 존립 필요성에 너무도 무덤덤한 교회, 복음주의라는 말로 채색하기에 바빠 그런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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