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교 입학과 초기 목회생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8.15 해방이 왔고 정진경은 서울신학교 재건과 학생모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 서둘러 상경한 그는 1945년 11월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모든 게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정진경은 기숙사에 입사했고 신학공부가 즐거웠다.

그는 이듬해 6월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을 찾아 신의주로 가려고 했으나 38선에 경계가 심하여 어려웠다. 그는 황해도 해주까지 어렵게 걸어갔는데, 그때 공산당에 반대하는 데모군중에 섞여 있다가 함께 체포되어 유치장에 성경을 읽으며 40일 간 갇혀 있었다. 혐의가 없어 석방된 그는 걸어서 신의주에 도착하여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공산당이 종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펴자 사람들마다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는 신학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혼자 서울로 떠났지만 해주 근처에서 소련 경비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기도했다. 다행히 통역하는 사람이 “저 분은 남하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그는 해주에서 몇 사람과 비밀히 배를 타고 밤중에 떠났다. 하지만 남쪽 육지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 소련 경비정에 발각되어 무차별 사격을 당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물속에 뛰어들어 죽을 힘을 다해 육지로 건넌 그는 남쪽 땅에 도착했고 서울로 들어가 신학공부를 계속하면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는 1948년 5월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했다. 홀아비 목회를 하게 되어 난감했는데, 며칠 후에 기적적으로 신의주에서 아내가 모진 고생을 하면서 딸아이를 업고 서울로 와서 신학교를 찾아와 온 가족이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첫 목회지는 공주성결교회였다. 충청도 양반 고장인 공주는 당시 유교사상이 팽배했고, 길에는 한복에 갓을 쓴 노인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유교가 제일이고 기독교는 예의범절을 모르는 상놈의 종교라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곳의 지역문화를 살피며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했다. 새해가 되고 음력설이 되자, 그는 동네에서 큰 소리를 치는 어른신들 집에 가서 정중히 세배했다. “저는 공주성결교회에 부임한 정진경 전도사입니다.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들고 성씨를 물었다. “예. 본은 연일(延日) 정씨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아이구. 거 만고충신 정포은 선생의 후손이구먼유”하며 환대했다. 그가 이 말을 부친에게 들은 적이 있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부터 공주에 훌륭한 양반가문의 전도사가 왔다고 소문이 났고, 소위 양반 자제들이 공주성결교회로 몰려와 교회가 부흥되었다. 그는 청년들에게 토요일마다 영어를 가르치고, 영어성경도 가르치면서 신앙생활과 희망을 강조했다. 1년 만에 서울 혜화동교회로 전임한 정진경은 이곳에서 6.25 전쟁을 당하였다. 그는 피난을 못하다가 혼자서 수유리 뒷산의 조그만 굴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서울지검 김 검사라는 반공검사를 만나 함께 지냈다.

어느 날, 그들은 가지고 간 식량이 바닥나 가까운 마을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다가 공산보안요원에게 체포됐다. 김 검사는 어디로 끌려가고, 그는 바위에 세워져 보안요원이 권총을 들이댔다. 그는 황급히 기도했다. “하나님. 주님 일도 못해보고 죽다니요. 살려주소서.” 그때 갑자기 그들 위로 폭음과 함께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자, 보안요원이 권총을 비행기를 행해 계속 쏘아댔다.

비행기가 사라지자, 권총 총알이 떨어졌다. “어, 당신 운이 좋구만. 그냥 집에 가시오.”하는 것 아닌가. 그는 정신없이 집에 와서 아내와 함께 걸어서 경주로 가서, 경주성결교회에서 목회하다 1952년 부산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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