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의 투쟁과 헌신의 결심

은행에서 열심히 일하던 정진경 집사는 가슴에 무엇이 밀려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내가 여기서 주판이나 만지고 있다니.” 그는 갑자기 일어나 주판을 바닥에다 힘을 다해 던져버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근처의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고 마음에 안정을 찾고 돌아와 태연히 근무하자, 동료들이 그를 정신이 돈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은행 업무를 계속하다 마음의 번민을 몇 번이나 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갑자기 몸에 열과 기침이 나면서 허리가 몹시 아파 결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한 결과 늑막염과 폐침윤이라는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폐병은 좋은 약이 없어서 거의 죽어가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회사를 퇴직하고 비장한 결심을 했다. “어머니, 쌀 두말만 주세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기도로 병을 고치겠어요.” 그는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쌀 두말을 어깨에 메고 정주의 석봉약수터로 갔다. 그는 초라한 움막 속에서 기도와 성경읽기만으로 보냈다. 기도제목은 두 가지였다. 병의 치유와 헌신하는 문제였다.

두어 달이 지냈을 때 그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출 15:26)라는 말씀을 읽은 후, 마음에 치유의 확신이 왔다. 그런 후 자신을 보니 전에 보다 기침도 덜하고 가래도 조금밖에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즉시 하산하여 그길로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아현동 서울신학교에 갔다. 그 때가 1941년 가을이었고 그는 전에 부흥강사로 오신 교장 이명직 목사의 방을 찾았다. “신의주동부교회에서 온 정진경 집사입니다. 소명이 있어 신학교에 입학하러 왔습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 목사가 “병색이 보이니, 일단 병원의 진찰을 받아보고 결정하자”며 그를 인근 병원으로 안내했다.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지금 상태로 공부하기 어렵다. 공기 좋은 곳에서 3년간 휴식하며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장이 “자네 뜻은 좋지만 몸이 좋지 않으니 일단 몸을 회복한 후에 다시 찾아오게나”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물이 났으나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자니 차비가 한 푼도 없어 난감했다.

그는 문득 자기 교회에서 시무하다 얼마 전에 서울 무교동교회로 전임한 김유연 목사가 생각나서 찾아갔다. 그의 자초지종의 얘기를 듣고, 김 목사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후, 격려의 말을 했다. 그는 김 목사에게 여비를 받아가지고 신의주로 돌아간 후, 다시 근처의 산 움막에 기거하며 기도와 성경말씀을 읽으며 지냈지만, 병이 낫지 않아 낙심이 됐다.

얼마 후, 그에게 편지가 왔다. 발신인은 서울 무교동교회 김유연 목사였다. 그가 봉투를 열자, ‘희망!’이라고 쓴 시 한통이 들어 있었다. 그는 시를 읽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희망!/ 나는 희망에 산다./ 희망은 나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한다./ 희망은 나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한다./ 희망은 나로 하여금 나아가게 한다./ 희망은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 희망!/ 나는 희망에 산다./ 희망 앞에 비애가 무엇이며/ 희망 앞에 실패가 어디 있으며/ 희망 앞에 낙망이 무엇이냐?//”

그는 시를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 시를 성경책 앞장에 붙여 놓고, 이 시를 먼저 읽고 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몇 달 후 그는 완전히 치유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서울로 올라갔지만, 서울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폐교가 된 때였다. 그는 부모의 성화에 따라 곽성옥 주교사와 결혼하고,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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